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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부터 10. 26 사태까지 한국 정당의 변천사

Illustration by Sihyun Lee

[객원 에디터 2기 / 이예환 기자] 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 중 하나인 정당은 1600년대 영국에서 처음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토리당과, 반 왕권적 성격을 보인 휘그당으로 나누어졌는데, 이후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토리당은 보수당,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발전되게 된다. 이렇게 생겨난 정치적 집단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며 한국에도 정당이 생기게 되었다.

한국의 최초의 정당은 정당의 정의에 따라서 나뉠 수 있는데, 조선 말기의 독립협회를 비롯한 단체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당파도 일종의 정당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치 집단들은 정권의 획득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점, 애국계몽 등의 교육 및 문화 활동을 주로 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근대적 의미의 정당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광복 이후에는 수많은 정당들이 쏟아져 등장하면서 최초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해외, 특히 유럽의 경우 민주주의의 도입을 몇백 년에 걸쳐 이루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급속도로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기반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서 정당들이 생겼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관민공동회를 비롯해 민주주의의 기반이 어느 정도 존재했지만, 근대식 정당에 대한 경험이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결국 대한민국은 초반부터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등 여러 시행착오를 경험하게 되었다.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집권하며 이승만을 중심으로 창당된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당으로 양당체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승만은 이후 대통령 권한을 대폭 강화하며 장기 집권 및 독재를 이어나갔지만, 부정 선거가 들통나며 4. 19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은 자진 해임하게 된다. 이승만과 같이 부정선거에 연루된 이기붕도 당 중앙위원회 의장을 사임하며 자유당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민주당의 경우 4. 19 혁명이 성공하며 전성기를 맞게 되고 당의 숙원이던 내각 책임제 개헌안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하였지만, 권력분배의 문제로 구파와 신파로 분당되면서 결국 내부의 안정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16 군사 정변에 이은 국가재건회의 포고 제6호로 두 당은 완전히 해산되었다.

군사정변으로 민주당이 붕괴된 이후, 한국의 정치상황은 한동안 국가재건 최고회의, 민정이양 등 과도기를 거치게 된다. 이후 1963년 1월 정치활동의 재개와 그해 12월 제3공화국 출범으로 이 과도기는 끝나고, 5. 16 군사정변의 주체세력을 중심으로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확립과 경제계획을 통한 국민생활수준의 향상 등을 표방하였던 민주공화당은 1963년 9월, 당대표를 박정희로 교체하고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역대 정당 중 최장수한 집권당이 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1961년 군사 쿠데타부터 9대 대통령까지 약 18년가량을 집권하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승리를 이어가며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당총재와 당무회의에 권력이 집중된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적인 조직체계가 점점 문제가 되고 있었다. 유신정우회라는 친위 집단까지 등장하여 정당으로서의 힘을 더더욱 잃던 민주공화당은 박정희 서거 이후 재건되지 못하고 1980년 10월에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으로 해체되었다.

그렇게 보수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권력을 누리던 시기, 민주 진영에는 민중당과 신민당이 있었다. 1963년 정치활동이 재개되고, 군사정변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주공화당에 대결하기 위해 단일 정당 형성 운동으로 여러 정파연합이 모여 단일야당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사전 조절 문제로 끝내 타협을 보지 못해 흐지부지된다. 2년 뒤, 결국 단일 야당을 형성하려고 한 야권의 노력이 빛을 발해 1965년 6월 14일 합당 전당대회를 통해 민중당이 창당되었다. 제3공화국에서 야당 제도의 기반을 마련하였지만, 지도위원의 선출과 관련하여 민정 당계와 민주당계 간의 갈등이 생겼고, 이 갈등이 지속되어 분당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특히나 한일협정의 비준과 국군의 베트남 파병동의안 처리에 관한 갈등이 컸는데, 이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 민정 당계의 윤보선 계는 완전히 민중당에서 탈당하여 신한당을 창당한다. 이후 완전히 두 파가 갈라지나 했으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교체를 위해 양당 간의 통합이 다시 추진되어, 1967년 2월 7일 양당의 통합 및 신당 창당대회를 개최하며 민중당은 신민당으로 발전하였다. 신민당은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고, 독재를 배격하며, 군을 쇄신하여 민주국가의 완성을 기한다는 강령을 정하였고,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을 내세웠으나, 제6대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에게 116만 표 차로 낙선하고 만다. 같은 해 6월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제7대 선거에서는 김대중이 후보에 당선되고, 신민당의 전폭적 선거운동이 있었지만, 다시 한번 박정희 후보에게 패했다. 하지만, 5월 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전 선거에 비해 훨씬 증가한 의석수를 얻게 되었다. 여당을 넘어설 정도로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호헌선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72년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국회가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이 중지되었다. 유신헌법 공포 후 정치활동이 재개되며 당수직에서 물러났던 유진산 의원이 다시 당수에 선출되나 1974년 사망하고, 김영삼이 새 대표위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1976월 1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되었고, 같은 해 9월 이철승이 대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유효 표면에서 민주공화당을 앞섰고, 1979년 5월 김영삼이 새로운 대표위원이 되었다. 당권을 되찾은 김영삼은 강경노선을 더욱 굳혔고, 여당은 총재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 처분하였다. 이렇게 정국이 경색된 속에서 박정희가 암살되는 10·26 사태가 발생하고, 민주화를 향한 이른바 ‘3김(金)의 각축’이 예상되었으나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이렇게 광복 이후부터 약 20년가량 동안 여러 분당과 합당을 거쳐 발전해온 정당들은 앞서 언급한 제5공화국 헌법으로 다 해산되고, 이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 중심의 민주정의당, 군부 개혁세력과 중립적인 관계에 있던 구민주 공화당계 및 우신 정우 회계의 인사들이 주축이 된 한국국민당, 구야 당계 정치인들이 창당한 민주한국당 등으로 계승되었고, 전두환이라는 새 독재자의 등장과 함께 다시 한번 군부정권을 격게 된다. 전두환이 퇴임하고 군정기는 마무리되게 되며 이후 한국에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으며 정당의 역할도 자리를 확실히 잡게 되었고, 그 정당들이 발전하고 계승된 것이 현재의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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