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즈덤 아고라 / 윤채원 기자] 2025년 10월,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취임하면서 일본은 ‘사나에노믹스’라는 이름의 새로운 경제 정책 패키지를 내걸었다. 이름부터 전임자인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아베노믹스’를 의식했다. 세 개의 화살, 확장 재정, 성장 우선주의. 구조는 비슷하다. 그러나 2013년과 지금의 일본 경제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같은 처방이 다른 병에 통할 수 있는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아베노믹스가 남긴 것 – 디플레이션의 종식, 그리고 새로운 고민
2012년 12월, 아베 신조 총리는 ‘잃어버린 30년’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처방은 세 가지였다. 일본은행이 국채를 사들여 시중에 유동성을 늘리고(양적완화), 정부는 재정을 확대하며, 규제 완화로 민간 투자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초기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엔화 가치 하락으로 수출이 늘었고, 닛케이225 지수는 2012년 말 8,600선에서 2018년 24,000선까지 올랐다. 오랜 디플레이션도 사실상 마무리됐다.
하지만 성과가 전부는 아니었다. 임금과 민간 소비는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고, 국가 부채는 계속 쌓였다. 양적완화로 풀린 유동성이 기업 투자로 이어지지 않은 채 금융시장에 머문 것이다. 일본의 GDP 순위도 밀렸다. 2011년 중국에, 2023년에는 독일에, 2025년에는 인도에 뒤처지며 세계 5위까지 내려앉았다. 2021년 이후 물가는 12% 상승했지만 실질임금은 오히려 7% 하락했다. 디플레이션은 끝났지만,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자리를 잡았다.
사나에노믹스 – 아베노믹스의 계승인가, 진화인가
다카이치 사나에는 아베 전 총리의 정치적 계승자로 분류된다. 경제 정책의 외형도 닮았다. 통화 완화 기조 유지, 확장 재정, 성장 전략이라는 세 축을 그대로 가져왔다. 2026년 일본 일반회계 예산은 약 122조 엔으로 전후 최대 규모이며, 신규 국채 발행만 29조 엔에 달한다.
차이는 방향성에 있다. 아베노믹스가 금융 완화와 민간 소비 진작 중심이었다면, 사나에노믹스는 정부가 성장 방향을 직접 설계한다는 점을 핵심으로 내세운다. AI, 반도체, 방산, 조선 등 전략 산업에 7조 2,000억 엔을 직접 투입하고, 에너지·식량 자급과 사이버보안 강화를 ‘위기관리 투자’로, AI·양자기술·스타트업 육성을 ‘미래 성장 투자’로 분류해 공급 측 구조 개혁을 추진한다. 아베노믹스 시절 기업 이윤이 늘었음에도 투자가 따라오지 않았다는 데 대한 대응이다. 연립 협약에 따라 2026년 4월부터 고등학교 무상교육과 학교 급식 지원도 시행된다.
주식시장은 빠르게 반응했다. 닛케이225 지수는 총선 직후 하루 만에 5% 이상 오르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시장에서는 이를 ‘다카이치 트레이드’라고 부른다.
낙관과 우려 사이 – 사나에노믹스가 풀어야 할 세 가지 과제
긍정적인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지목하는 과제는 세 가지다.
첫째는 재정 지속 가능성이다. 일본의 국가부채 비율은 GDP 대비 236%로 주요 선진국 중 가장 높다. 확장 재정이 국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면 채권시장 불안으로 번질 수 있다. 다카이치 정부는 2023년 이후 인플레이션 덕에 명목 GDP와 세수가 함께 늘면서 재정적자 대 GDP 비율이 2025년 기준 약 1.3%까지 낮아진 점을 근거로 재정 여력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는 실질임금과 민간 소비 문제다. 2022년 4월부터 2025년까지 44개월 중 실질임금이 플러스를 기록한 달은 단 4개월이다. 성장 지표가 개선되더라도 그 효과가 가계로 흘러가지 않으면, 아베노믹스와 같은 한계를 반복할 수 있다.
셋째는 대외 변수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일본 수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줬고, 엔화 약세 기조가 이어질 경우 수입 물가 상승이 다시 가계를 압박할 수 있다. 반대로 엔저는 일본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 수출에 부담을 줄 수 있다. 일본 국채 금리가 오르면 글로벌 자금이 일본으로 이동하면서 한국 국채 금리에도 상방 압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가가 돌아온 시대 – 사나에노믹스의 더 넓은 맥락
사나에노믹스는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IRA, 유럽의 그린딜, 중국의 산업 보조금 정책까지, 주요국들이 시장에 개입해 성장 방향을 직접 설계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공급망 재편과 경제 안보가 경제 정책의 핵심 키워드로 올라선 시대에, 일본도 그 흐름에 올라탄 것이다.
아베노믹스가 디플레이션 탈출이라는 과제에 대한 응답이었다면, 사나에노믹스는 스태그플레이션과 저성장, 기술 경쟁이라는 복합적인 환경에서 내놓은 다음 시도다. 처방이 맞는지는 앞으로의 데이터가 말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