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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 미국은 어떻게 초강대국이 되었을까

Illustration by Junhyeon Cho (DAA Grade 11)

by Kangrae Kim (DIA Year 9)

1783년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하여 파리조약으로 탄생한 초기 미국은 자유를 바라며 찾아온 이민자들을 바탕으로 힘과 기술을 키워 발전해나갔다. 현재 미국은 400년도 안돼 유럽의 국가들마저 뛰어넘는 엄청난 강대국이 되었고 그들의 개척 정신, 즉 프런티어 정신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프런티어의 사전적 의미는 지금까지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로 프런티어 정신이란 말 그대로 미개척지를 개척하는 정신이다. 즉, 도전과 용기를 지닌 혁신을 말한다. 대륙의 동쪽에서부터 시작된 미국은 그들의 프런티어 정신으로 서쪽까지 전대륙을 개척해나갔고 이것이 집중적으로 보였던 때가 바로 1803년부터 1848년까지로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만의 아메리칸 시스템을 구축하며 지금의 산업 발전국이 되었다.

미국이 독립을 한 후, 세계적으로 초강대국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장본인은 바로 미국의 초대 재무부 장관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렌산더 해밀턴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며 이민자이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여의고 10대 때 사탕수수 농장과 무역회사 점원으로 일하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 당시의 서인도제도에선 유럽과 신대륙을 잇는 국제무역이 활발했고 그는 서인도제도에서 행해지는 국제적인 거래를 직접 보고 배우게 된다. 또 그는 불평등한 계급 구도를 보고 자라며 여러 글을 썼고 무역하는 상인들은 해밀턴이 워낙 똑똑하니 뉴욕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자고 결정했다. 해밀턴은 2년 만에 자신의 학업을 끝마치게 되지만 그는 미국에 와서 영국 본토와 식민지 사이에 갈등과 불화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고 영국을 상대로 미국의 독립전쟁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전쟁 중,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을 만나 그의 보좌관이 되었다. 

해밀턴은 큰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바로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아 군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급여도 받지 못하고 물자도 부족한 상황에 다른 주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독립군은 13개 주의 재정으로 운영이 되는 힘이 없는 조직이었고,  그가 지원을 받기 위해선 대륙 회의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13개 주의 대표가 참여하여 각 주의 의견을 모아 위원회를 결성하고 다시 그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지원물자가 지급되었기 때문에 늘 자금을 확보하는 길은 더뎠고, 강력한 연방을 향한 열망이 절실해졌다. 드디어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해내며 미국을 독립시키는 데 성공하였지만 독립전쟁 때 빌린 막대한 부채로 파산위기에 몰렸다. 각 주의 대표들은 해결책을 찾지는 못할 망정 서로 다투고 있었고 해밀턴은 미국의 경제를 구제하려면 흩어져 있는 주들을 하나의 강력한 연방으로 묶어 경제를 통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해밀턴은 연방주의자 논설을 작성하였는데 이 논설에는 강한 정부를 위해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헌법이 필요하다고 설득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 헌법이 채택되며 초강대국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발판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초창기 미국에서는 알렌산더 해밀턴을 중심으로 강한 연방을 원하는 연방파와 토마스 제퍼슨을 중심으로 강한 주 정부와 약한 연방을 원하는 반연방파 사이의 대립이 생겼다. 연방파는 독립전쟁 후에 생긴 7900만 달러의 부채를 먼저 해결하고, 후에 여러 획기적이고 도전적인 발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반연방파는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주 정부의 자치권을 약화하는 것은 미국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영국 군주제로 돌아간다 것을 뜻한다며, 농업 위주로 주의 권한을 우선시하며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보니 남북의 자연환경에 따라 주들의 선택도 달라졌다. 연방파는 동북부 해안도시의 상공업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반연방파는 농장에 기반을 둔 남부의 농업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또 이들은 국립은행을 설립하는 것에서도 대립이 생겼는데 공적자금을 보유하고 시민들에게 이자를 지불할 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해밀턴과는 다르게 제퍼슨은 국립은행의 설립은 투기와 부패를 가져올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이 두 파의 대립은 해밀턴의 죽음으로 반연방파의 승리로 보였으나 국립은행의 설립은 투자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또 이후에 제퍼슨이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뉴 올리언스 땅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루이지애나는 자그마치 1500만 달러의 가격이었는데 전에 해밀턴이 쌓아놓은 신용 덕분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고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루이지애나 전체를 구입함으로써 엄청난 영토확장을 이루게 되었다. 결국 반연방파인 제퍼슨도 해밀턴이 쌓아놓은 미국 시스템에 덕을 본 것이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이 미국의 제조업을 우선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발판이 되어 미국은 제조업 강국이 되었다. 그들이 제조업 분야에서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타국에서 오는 여러 앙트레 플래너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여러 앙트레프레너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스탠더드 오일의 존 록펠러, 철도왕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 컨베이어 벨트의 헨리 포드 등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철도 변호사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더 많은 앙트레프레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철도가 미국 발전의 열쇠이자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철도는 전부 규격이 달랐고 그는 기차가 모든 철길을 이어서 달릴 수 있도록 철도 규격을 통합하여 효율성을 높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 그는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부터 동부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만들 계획을 세웠는데 이 횡단철도가 만들어진다면 미국에서 엄청난 운송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에 서부에서 동부까지 도착하려면 최소 6개월 동안 마차로 황야를 횡단하거나 3개월 동안 바닷길을 이용하여 남미를 빙 돌아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 철도가 생겨난다면 고작 6일로 단축되게 된다. 하지만 서부와 동부를 가르는 미시시피 강과 여러 산맥들이 문제가 되었다. 마침내 1862년, 링컨 대륙횡단철도 건설 법안인 미국 태평양 철도법안을 내놓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그는 남북전쟁 후 노예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애니 말론, 비디 메이슨, 부커 워싱턴 같은 노예 출신 앙트레프레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시작했지만 단기간에 많은 발전을 이루어내며 지금은 전 세계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만약 그들의 도전적이지 않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안정적인 발전만 고집했다면 절대 지금의 미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를 거듭해 나가면서 마침내 여러 앙트레프레너들이 성공을 이루게 되었고 이는 미국의 뼈와 살이 되었다. 우리 대한민국도 이런 도전적인 정신을 본받아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고 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언젠간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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