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위즈덤 아고라 / 김정서 기자]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는 연구실에 있던 거미에게 물린 후 벽을 타는 능력, 감각이 예민해지는 능력 등이 발현된다. 이러한 스파이더맨의 능력들은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 후천적으로 거미에게 물린 후 생긴 것이다. 스파이더맨과 같이 급격한 신체적 변화가 아니더라도 유전자가 후천적으로 바뀌는 상황이 현실에서도 가능한 이야기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없다. 영화 <스파이더맨>과 같이 공상과학이 가미되지 않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말한다면, 스파이더맨의 주인공 피터 파커는 유전자가 후천적인 변화를 거쳤지만, 현실에서는 피터 파커가 이미 ‘스파이더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고, 거미의 물림은 그저 촉매제가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김경철의 칼럼 ‘음식이 과연 유전자를 바꿀 수 있을까?’에서는 ‘내가 매일 먹는 음식이 유전자의 발현을 바꿀 수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유전자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하나의 특성으로, 이론적으로 이는 바뀌지 않은 채로 후손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렇기에 후천적으로 유전자가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의 발현(expression)’은 음식, 생활 등 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바뀔 수 있다. 이는 마치 스위치처럼 외부 환경에 의해 켜져서 발현될 수도, 꺼져서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영화 속 스파이더맨은 거미에 물린 후 신체적 변화를 겪지만, 현실에서는 단순히 후천적인 영향만으로 유전자가 변하지 않는다. 다만, 특정 환경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거나 끌 수는 있다.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다. 후성유전은 음식 등의 외부 요인들도 작용하지만, 스트레스 등의 요인들도 인간의 유전자에 영향을 주어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주기도 한다.
후천유전학을 가장 잘 설명하는 예는 일벌과 여왕벌이다. 꿀벌은 모두 여성이며, 자매라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일벌이 4주를 생존하며 불임이고, 여왕벌은 1년 이상을 생존하며 평생 200만 개의 알을 낳는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일벌과 여왕벌 사이에는 유전학적인 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이러한 차이점은 왜 생길까? 이는 음식, 즉 후천유전과 연결된다. 로열젤리를 먹은 여왕벌은 특정 유전자의 메틸화(methylation)가 억제되면서 생식 기능이 활성화된다. 즉, 영양 섭취가 유전자의 스위치를 조절해 생물의 역할을 결정하는 사례다.
그 외에도 기근이 후손의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존재한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전문연구위원 김치순의 연구 보고서 ‘후생유전 변화에 미치는 영양의 역할’에 의하면, 4개월 간의 네덜란드 기근 당시, 임산부들은 심각한 영양 부족을 겪었는데, 임산부가 임신 초기, 중간 또는 마지막이냐에 따라 후손의 질병 위험이 달랐다. 임신 초기에 기근에 노출된 자손은 친 죽종형성 지질 심혈관 합병증이 있고 인식 능력이 낮게 드러나고, 임신 중간에 노출된 자손은 신장과 폐 기능이 좋지 못하였으며, 마지막의 경우에는 성인기에 당 부하가 매우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시가 보여주듯, 유전자 발현에서 후생유전과 연관되는 변화는 잠재적으로 보일지라도 안정화되는 경향이 있고 질병 위험의 연령 의존성을 늘린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피해자들은 암 발병률이 높고 여러 질병에 취약하며 그들의 자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보도가 많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나경과 정연 저자는 그들의 연구 보고서 ‘끝나지 않은 고통: 원폭피해자 2세의 건강 수준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원자폭탄 피해자 2세들의 건강 수준은 진환 이환 상태, 주관적 건강 수준, 정신건강 수준, 활동제한 등 전반적으로 일반 인구집단에 비해 좋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는 방사능 노출이 폭발 당시 있었던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흔히 사람들이 임신한 사람을 봤을 때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후성유전학이 태교의 중요성을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해준다. 태아 재프로그램(fetal re-programming)이라는 말을 아는가? 이는 임신기간에 엄마가 먹는 음식에 따라 자녀의 질병이 결정된다는 후성유전학의 개념이다. 쥐를 통한 실험 결과, 임신한 엄마 쥐가 먹은 엽산의 양에 따라 자녀 쥐의 피부색과 질병의 취약성이 다르게 나왔다. 이 연구는 산모 때 먹는 특정 음식과 스트레스 등의 환경이 후세대에도 전달된다는 것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현재 후성유전학에 관한 연구는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질병 치료의 목적으로 후성 유전 교정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조동규 교수 연구팀은 엑소좀을 통해 치료 단백체를 생체 내에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알츠하이머 치매 등의 질환 치료에 적용할 수 있는 치료법을 개발한 바 있다. 국제학술지 브레인(Brain)에 게재된 미국 버펄로대학교의 과학자들이 이끈 연구팀도 후성유전학적 유전자 변화를 통해 알츠하이머병의 기억력 저하를 되돌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연구 외, 이러한 기술이 상용화되기 위해 국내외 바이오제약회사들 또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은 유전자 제어시스템을 조절해 암을 일으키는 비정상적인 세포증식을 억제해 질환을 치료하는 항암제를 개발하려는, 후성유전학에 기초한 신약개발을 하는 중이다.
영화 <스파이더맨>처럼 유전자가 후천적으로 변하는 일은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 유전자 발현은 환경과 생활 습관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즉, 타고난 유전적 요소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욱 중요한 요소이며, 후성유전학을 통해 질병의 치료에 관한 연구가 지속되는 것을 보아 훗날 질병의 발현을 온오프 스위치처럼 조절할 수 있는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위즈덤 네이처]생화학이란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이나 생명현상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최근에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하면 모두가 아는 정도로 진화론은 대중화되었습니다. 한 생물이 진화하는 것에 대한 증거로는 이를 구성하는 유전자나 단백질 등의 생화학적 특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물체가 현재에 존재하기까지 어떤 내외부 환경을 겪어 진화를 했는지 고찰해보는 컬럼을 연재합니다. 위즈덤 아고라 김정서 기자의 ‘위즈덤 네이처’로의 생화학 속 진화론의 세계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