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의로운 선택의 기준, 벤담과 칸트

< Illustration by Haewon Choi >

[객원 에디터 3기 / 하민솔 기자 ] 우리의 하루는 선택과 함께 시작된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식사는 어떻게 할지, 학교에 걸어갈지 버스를 탈 지 고민한다. 또 여가 시간에 유튜브를 볼지 게임을 할지 선택하고, 행동에 대한 결정을 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맞이하고, 보통 선택의 효율성이나 선호도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종종 그래야만 한다고 느끼는 선택들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예로 들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한다거나 주운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싫고 비효율적이라도 해야만 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존재한다. 그런데 과연 이 선택이 사람마다, 혹은 상황마다 항상 같을까? 과연 정의의 기준은 무엇일까? 

인간이 하는 모든 선택과 해결해야 할 문제는 도덕과 윤리, 정의에 얽혀있다. 인간이 행하여야 할 올바른 길이며 공동의 선에 해당하는 길이 바로 윤리이고, 도덕은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원칙으로서 개인의 양심과 관련되어 있다. 또 정의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뜻한다. 하지만 도덕, 윤리 그리고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정의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본질은 평등,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구분하였으며, 고대 로마의 법학자인 울피아누스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리려는 항구적인 의지’라고 규정하였다. 

18세기 영국에는 죄를 판단할 합리적 기준이 없어서 법조인들이 원한다면 무고한 시민들도 범죄자로 만들어 감옥에 넣을 수 있었다. 영국의 대법관은 ‘공리의 원칙은 위험한 원칙이며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염두에 두는 것조차 위험하다’라고 했으며 이를 기준으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제레미 벤담은 다수의 시민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막고, 정의의 새로운 기준을 위해 ‘자연적 체계’로 범죄를 나눴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해악을 꺼려하고 즐거움과 행복에 끌리게 되어 있으며, 어떤 행위가 쾌락보다 고통을 더 발생시켰다면 그것을 범죄라고 부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쾌락의 극대화가 정의이며 실질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벤담의 경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가능한 고통을 줄이고 많은 쾌락을 만들게 되면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부자이든 가난하든 평등하며 고통과 쾌락의 크기는 같기에 계산을 통해 소수의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다수의 행복을 추구한다라는 이론이다. 하지만 당시 다수가 약자였던 사회에서 공리주의식 결과는 강자가 피해를 봤지만 현재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극빈층의 약자가 소수라면 그들은 늘 피해를 봐야 한다. 또한, 다수가 늘 옳은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공리주의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반면, 칸트는 인간이 욕망의 논리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 선한 것을 추구하는 의지를 가졌다고 봤으며 이 선의지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며, 우리가 배운 대로 옳은 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즉, 나에게 옳지 않더라도 인간은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선의의 거짓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같은 행동이라도 의무에서 나온 행동만이 도덕적이며 무엇을 바라고 한 행동은 선한 결과를 위한 것이라도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즉 거짓말을 하지 말자는 것이 정언명령이며, 선한 결과가 예상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것은 가언 명령이다. 우리는 정언명령을 따라야 하며, 이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보편성’에 있다. 돈을 갚을 수 없으면서도 갚을 수 있다는 거짓 약속을 하는 것을 정언명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짓 약속’은 이미 약속이 아니다. 누구나 거짓 약속을 하게 되면 아무도 약속 자체를 믿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 약속을 하지 마라’가 정언명령이 되는 것이다. 많은 상황들 중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칸트는 어떤 경우라도 옳은 정언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행동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리고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가혹한 결과가 예상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칸트의 정의는 매몰차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상황과 장소 등 주변 환경에 따라서 바뀐다고 생각한다. 벤담처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입장에서 선택할 문제들도 있지만 무조건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칸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선의의 거짓말’조차 허용하지 않는 정의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선의지에 의한 행동이 요즘 사회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큰 피해가 예상되지 않는다면 ‘선의의 거짓말’은 허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 기호와 효율성의 사이에서 선택하게 되지만, 때로 싫어도, 효율성이 떨어져도 옳은 가치와 정의의 판단으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지난 1월, 일본 도쿄 JR신오쿠보역에는 21년 전 일본인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의인 이수현 씨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추모글이 걸렸다고 한다. 2001년 당시 유학생이었던 이수현 씨는 술에 취해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비록 취객도 구하지 못하고, 이수현 씨도 목숨을 잃었지만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선의지’를 실천한 것은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점점 사회가 개인주의화되고 각박해지는 요즘, 다수나 이익을 위한 정의보다 순수한 칸트식 선의지가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의의 어떤 기준도 강제적이거나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 판단기준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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