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삼일절, 만세 운동의 선두에 섰던 학생들

삼일절을 맞이해 알아보는 3.1 운동

당시 만세 운동의 주축이었던 학생들의 활약

<Illustration by Haewon Choi 2005 (최혜원)>

[객원에디터 4기 / 박다빈 기자] 다가오는 3월 1일은 3.1 운동을 기념해 지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 삼일절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삼일절이 어떤 날인지 정확히 모르거나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다. 1948년 제헌 이래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에서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승계하여 정부를 수립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건국 정신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고 오늘날의 우리나라를 존재하게 한 날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국경일인 삼일절에 대해 알아보자. 

삼일절은 앞서 설명한 대로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만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지정된 국경일로, 우리나라의 여러 국경일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고 유서가 깊은 기념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무려 1920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되었던 3.1절은 당시 ‘독립선언일’로 명명되었다. 3.1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은 상해 올림픽대극장에서 성대하게 열렸으며, 국무원과 임시의정원 의원 등이 참석한 기념식과 상해민단이 주최한 대축하식, 자동차 만세시위 운동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3월 1일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자들과 광복을 열망하는 온 민족의 가장 큰 기념일이었으며 ‘독립선언일’, ‘3.1절’이라 부르며 기미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전통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에 의해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3.1절을 4대 국경일로 지정함으로써 3.1절은 임시정부로부터 내려온 국경일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한 자리에 모여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한 날이다. 이 3.1 운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나라와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하고 드높은 민족의식과 민주의식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일제의 공포정치에 대응한 우리 민족의 비폭력 평화시위는 무력과 평화의 대립을 보여주는 행위 그 자체였다. 이러한 비폭력적 대응은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는 무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강압 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 전략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3.1 운동으로 인해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으니 3.1 운동은 실로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고 훗날 광복을 맞이하는데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3.1 운동이 학생들의 선동이라고 칭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3.1 운동은 당시 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국의 첫 독립 선언서인 ‘무오 독립 선언’의 영향을 받은 일본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일제의 중심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외쳤고, 2.8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동시에 와세다대학 유학생 송계백을 국내로 밀파해 국내에서의 독립 선언도 추진하였다. 

1919년 1월 국내에 도착한 송계백은 자신과 연이 있는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린, 보성중학교 선배이자 중앙학교 교사인 현상윤,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와 최남선을 만나 독립선언서 초안을 보여주었고, “젊은 학생들이 이같이 의거를 감행하려는 이때에 우리도 선배들로서 좌시할 수 없다”며 독립운동 준비에 열의를 보인 이들에 의해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1919년 1월 말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모의되었다. 전문학교 대표들은 2월 내내 회의를 연 끝에 3월 1일에 중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탑골공원에서 독립시위를 벌이고 3월 5일에는 학생만의 독자적 시위를 전개한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이후 전문학교 대표들이 경성고등보통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신학교, 중앙학교, 선린상업학교 등의 학생들을 만나 독립시위에 대해 알렸으며 중등학교 학생들은 서울 시내에서 선언서를 나눠주고 군중을 동원하며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준비 끝에 3월 1일 당일에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탑골공원에 모여 만세를 외쳤으며 학생 독자 시위 예정일이던 3월 5일에는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집결해 독립시위를 전개했다. 5일 시위에는 거리의 시민은 물론,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귀향길에 오르기 위해 역으로 나온 사람들까지 합세하며 시위대 규모가 순식간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총독부는 학생 시위의 확대를 우려하며 3월 10일 서울 시내 중등학교와 전문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렸으나 휴교 조치가 무색하게 학생들은 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시위를 더욱 확산시켰다.

2015년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3.1 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성인은 10명 중 3명으로 3.1절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수가 드물었다. 심지어 학생들의 경우 3.1절이 무슨 날인지 아냐는 질문에 ‘3.1절이 독립기념일인 줄 알았어요’, ‘학교 안 가는 날이요’, ‘가족들이랑 놀러 가는 날이요’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3.1절은 선조들이 희생을 통해 보여준 애국심과 투쟁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셨던 분들을 마음에 새기며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달아 기념하는 날이다. 심한 비나 바람과 같이 기상이 악화되면 국기의 존엄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기에 태극기를 달지 않고, 날씨가 괜찮아지면 다시 게양해야 한다. 3.1절이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게 한 중요한 날이니,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3.1절이 무슨 날인지 정확히 알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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