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즈덤 아고라 / 윤채원 기자]
지난달 미국 상무장관 하워드 러트닉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향해 “미국으로 데려와 공장을 짓게 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한국 기업이 미국 내 투자 확대에 소극적일 경우 반도체 품목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뜻도 내비쳤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를 두고 한국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며, 트럼프 정부가 이를 규제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을 짚었다. 실제로 1980년대 미국이 일본 반도체 산업을 겨냥해 체결한 미일 반도체 협정이 지금 한미 구도의 선례로 거론되고 있다. 1980년대 일본이 걸어온 길을 보면 인과관계가 비교적 뚜렷하다.
출발점은 무역 불균형이었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자국 내 판매가격이나 생산원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상품을 해외에 파는 이른바 ‘덤핑 수출’ 방식으로 미국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늘렸고, 그 결과 인텔을 비롯한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메모리 사업에서 밀려났다. 여기에 미국은 물건을 계속 사주는데 일본은 미국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는 무역수지 불만까지 겹쳤다. 미국의 대응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저평가된 엔화를 문제 삼아 5개국이 함께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췄다. 그 결과 엔화는 2년 만에 달러 대비 65.7% 절상됐고, 일본 기업은 가격을 올리지 않아도 저절로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는 구조에 놓였다. 다른 하나는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이다. 미국은 기업의 공식 문제 제기(제소) 없이도 정부가 직접 조사해 고율 관세를 매길 수 있는 직권조사 권한을 앞세워 일본을 협상 테이블에 앉혔고, 결국 일본은 자국 내 외국산 반도체 점유율 확대와 덤핑 수출 중단에 합의해야 했다. 환율로 가격 경쟁력을 꺾고, 관세 위협으로 시장 개방을 강제한 이 이중 압박은 이후 일본의 장기 침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반론도 있다. 엘피다 메모리 출신 기술자 유노가미 다카시는 협정의 실질적 영향은 크지 않았고, 진짜 원인은 일본 기업들의 수익성 개선 실패에 있었다고 본다.
지금 한국이 놓인 상황도 비슷한 논리로 흘러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생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AI 산업에 필수적인 첨단 메모리를 한국 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미국 내에서 커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대만이 “미국 반도체 산업을 훔쳤다”는 인식을 공개적으로 밝혀온 배경이다. 대응 방식도 두 갈래로 나타난다. 하나는 관세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수입품에 최고 100%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해 왔는데, 이는 1980년대의 엔고가 환율을 통해 일본 제품 가격을 올렸던 것과 비슷하게, 세금을 통해 직접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낮추는 효과를 낸다. 다른 하나는 투자 요구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약 370억 달러,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약 38억 7,000만 달러 규모의 공장 건설을 이미 추진 중인데, 미국은 이를 더 늘리라고 압박하고 있다. 마이크론이 2035년까지 미국 내 투자를 2,500억 달러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하면서 그 압박의 기준점은 더 높아졌다. 1980년대가 관세와 시장개방 요구로 일본 기업의 ‘수출’을 억눌렀다면, 지금은 관세와 투자 요구로 한국 기업의 ‘생산기지 자체’를 미국으로 옮기라는 압박이라는 점에서 방식이 한 단계 더 직접적이다. 다만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트럼프 2기 행정부와 의회가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의 강도를 놓고 온도 차를 보이면서, 오히려 한국 기업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고 짚는다.
이런 통상 압박은 진공 상태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종목이 코스피 시가총액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다 보니, 두 기업을 둘러싼 신호 하나하나가 곧바로 지수 전체를 흔든다. 2026년 7월이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코스피는 6월 22일 사상 최고치(9,114.55)를 찍은 뒤, 중국 반도체 업체의 첨단 노광장비 자립 소식과 AI 관련 순환출자 우려가 겹치며 7월 28일 하루 만에 10.84% 폭락(6,023.66 마감)했다. 다음 날에는 SK하이닉스의 실적 부진과 주주환원 정책 부재까지 확인되며 5.98% 추가 하락(5,663.24 마감)했고, 고점 대비 낙폭은 33.91%까지 벌어져 외환위기·금융위기 당시 월간 낙폭을 넘어섰다. 그런데 7월 31일 삼성전자가 매출 171.5조 원, 영업이익 89.5조 원으로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내놓자 코스피는 하루 만에 17.91%(1,001.89포인트) 급등해 사상 최대 상승률·상승폭을 기록했다. 한 달 사이 사상 최고치, 사상 최대 폭락, 사상 최대 반등이 모두 나온 셈인데, 원인은 다르지 않다. 같은 두 종목에 대한 외부 신호가 그때그때 지수 전체를 그대로 증폭시켰을 뿐이며, 미국의 통상 압박이 겨냥하는 지점도 정확히 이 두 기업이라는 점에서 통상 리스크와 증시 변동성은 뿌리가 같다.
두 시대를 나란히 놓고 보면 같은 출발점, 다른 도구가 눈에 띈다. 1980년대는 환율이라는 간접적 도구로 압박했다면 지금은 관세와 현지 생산 요구라는 직접적 도구가 동원되고 있다. 대체 가능성도 다르다. 1980년대 미국은 인텔 등 자국 기업으로 일본 반도체를 대체할 여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파운드리는 TSMC, 메모리는 한국·마이크론 중심 구도여서 미국이 단기간에 한국을 대체할 공급처를 찾기 어렵다. 이는 협상에서 한국의 레버리지가 1980년대 일본보다 클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안보상으로는 동맹이면서 경제적으로는 견제 대상이 되는 이중적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은 여전히 같다. 무역 불균형이나 공급망 장악이라는 원인에서 출발해 환율이든 관세든 특정 도구로 압박하고, 그 압박이 경쟁력 약화나 생산기지 이전으로 이어지는 큰 인과 구조 자체는 40년 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다. 도구가 더 직접적으로 바뀌고 한국의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변수가 새로 더해진 지금, 같은 각본이 같은 결말로 이어질지는 아직 열려 있는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