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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 통일을 위한 준비

Illustration by Junhyeon Cho (DAA Grade 11)

by Nayoung Kim (DIA Year 11)

대한민국은 현재 유일한 분단국가이다. 휴전 중인 국가는 불안하고 위험한 국가라는 뜻이기 때문에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2018년 평창 올림픽을 기점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열며 통일에 한 발짝 다가가는듯 했지만 북미 간의 대화는 끊어졌으며, 지난여름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이후, 남북의 대화채널은 멈춰버렸다. 또한 분단 70년이 지나면서 예전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시선은 점점 부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나 불안정한 사회에서 살 수 없으며 언젠가는 통일을 해야 한다. 2차 대전 이후,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동독과 서독으로 나눠졌던 독일이 통일을 이룬 사례에서 해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제국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1945년 5월 8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연합국의 점령 지구로 분할되었다. 특히, 수도인 베를린은 1949년 10월 7일 동독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동과 서로 나뉘게 되었고, 서베를린은 동독 안의 자유주의 체제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TV를 통해 동독과 서독의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볼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사회주의 경제에서 살아온 동독의 사람들은 자신이 능력만큼 돈을 벌 수 있고 자유가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서독으로 가고 싶어 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하자 동독은 1950년대 초반에 동서 베를린 간에 철조망을 치고, 감시탑을 세워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게 된다. 하지만 동독 정부의 억압이 심화되면 될수록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탈출 현상은 증가하였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무려 27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결국 동독은 1961년 8월 12일부터 13일 새벽까지 콘크리트 벽을 쌓아 베를린을 동서로 분할시킨다. 그 후 베를린 장벽은 분단의 벽으로서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 되었다. 1989년 11월에 100만 명이 넘는 동독 주민들의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공산당 대변인인 권터 샤보브스키가 국경을 개방한다는 말실수를 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고, 40여 년에 걸친 민족 분단을 극복해 1990년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독일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들은 다양하다. 신동방 정책을 추진한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는 독일의 통일이 유럽 전체의 평화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깨닫고 긴장을 완화시켜 교류 협력을 추진하였다. 또한,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에 무릎을 꿇으며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이며 국제사회의 시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해 서독은 동독을 포함한 소련, 폴란드 등의 동유럽 국가와 평화적인 외교 협정을 맺었고 이는 통일을 이루는 첫 발걸음이었다. 또한 신동방 정책을 통한 동독와 서독간의 교류는 독일 민족의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했고, 서로 다름에 대한 이질감을 줄이면서 흡수 통일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기적적인 일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단지 공산당 대변인의 말실수로 인한 것으로 보이지만 동독 주민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모든 작은 요소들이 모여 통일이라는 아주 큰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실제로 서독은 통일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지만 실제 통일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겪었다. 특히 동독은 주민들의 삶과 사회 전반의 모습이 달라졌다. 사회주의 동독 사람들은 서독 상품들이 동독보다 훨씬 질이 좋다고 판단하여 서독에서 생산된 물건만 구매하였다. 이로 인해 동독 상품은 팔리지 않았고 기업은 파산했으며,  많은 동독 주민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래서 통일 이후 동독이 겪었던 가장 큰 문제는 실업이었다. 또한 당시의 동독과 서독의 경제 격차는 3.5배로 이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경제 개혁과 지속적인 구동독 지역 개발로 통일경제의 강점이 부각되고 국가 경제력도 높아졌다. 또 독일이 이뤘던 가장 큰 경제적 성과는 유럽 내 절대적인 제1위의 내수 시장으로 도약했다는 것이다. 또한 통일 초기에 비해 구동독 지역의 경제와 생활 여건도 개선되었다. 구동독 지역의 1인당 GDP는 통일 이후 연평균 5.5%로 빠르게 증가하면서 약 67% 수준으로 높아졌다. 독일은 통일 후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했지만 ‘자유’를 위한 당연한 대가로 여기며 협력과 혁신의 경제 개발을 통해 큰 경제적 성과를 이뤄냈다.

우리나라의 통일은 많은 위험 요소들이 있지만 장기간으로 봤을 때에는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동북아의 통로가 열리면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 또한 높아질 것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현재 남한과 북한이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을 최소화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6.25 전쟁 때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게 하고, 이산가족의 만남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편지나 전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넓혀야 한다. 또한 문화의 이질화를 줄이기 위해 남북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문화 교류를 확대하는 것은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남북의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한 통일 비용을 서로 협력 하에 준비해 나가고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남북한 경제 협력을 확대하여야 한다. 하지만 통일연구원에 따르면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10명 중 4명이 남북한이 한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이룰 필요는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지금 그들의 삶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방식의 통일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렇기에 성급히 통일하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한국 경제가 더욱더 활성화되고 통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경제적 여력을 갖추는 게 우선시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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