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합을 모방한 신소재

[위즈덤 아고라 / 우성훈 기자] 착제를 물에 젖은 표면에 붙여 보면 생각보다 쉽게 떨어진다. 접착제와 표면 사이에 있는 물 분자가 직접적인 접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닷속의 홍합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끊임없이 파도가 치고 바위 표면이 젖어 있는데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홍합은 단순히 강한 힘으로 바위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특별한 화학적 접착 방식을 이용한다. 이 원리를 인공 재료에 적용하려는 연구가 바로 홍합 모방 접착제다.
홍합을 자세히 보면 껍데기 아래에서 여러 가닥의 실처럼 생긴 구조가 뻗어 나온다. 이를 족사라고 한다. 족사는 끝부분을 바위에 고정해 홍합이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한다. 이 구조에서 중요한 물질 중 하나가 접착 단백질이며 특히 이 단백질에는 DOPA라는 변형된 아미노산이 많이 존재한다. DOPA에는 ‘카테콜’이라는 화학 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카테콜은 두 개의 하이드록실기를 가지고 있어 광물이나 금속 산화물과 여러 형태의 상호작용을 만들 수 있다. 결국 홍합의 강한 접착력은 단순히 끈적한 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이 아니라 분자 수준에서 젖은 표면과 강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 원리가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물이 존재하는 환경에서 접착하는 방법 자체가 일반 접착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접착제가 단단하게 굳는 것만으로는 좋은 수중 접착제가 될 수 없다. 표면에 붙는 힘과 함께 파도나 충격을 받았을 때 에너지를 흡수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홍합의 족사는 단단한 부분과 비교적 유연한 부분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여러 종류의 결합을 이용해 외부에서 힘을 받아도 구조 전체가 한 번에 끊어지는 것을 막는다. 이런 특징 때문에 연구자들은 홍합을 단순한 생물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새로운 고분자와 복합재료를 설계하기 위한 모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카테콜의 화학을 인공 고분자에 적용하고 있다. 한 방법은 고분자 사슬에 카테콜 작용기를 붙인 뒤 철 이온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철 이온은 여러 카테콜과 배위결합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고분자 사슬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연결점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결합이 영구적인 결합만 있는 구조와 다르다는 것이다. 재료가 잡아당겨질 때 일부 결합이 먼저 끊어지면서 에너지를 흡수하고 이후 다시 형성될 수 있다. 2017년 보고된 연구에서는 이러한 철-카테콜 복합체를 이용해 고분자의 인성을 크게 높였으며, 젖은 환경에서도 홍합에서 영감을 받은 결합 방식을 구현했다.
홍합의 원리가 실제 재료 성능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국내 연구도 있다. 서울대 치의학대학원과 미국 UC 산타바바라 연구진은 카테콜을 이용해 치아 표면에 약 1nm 두께의 매우 얇은 프라이머층을 형성했다. 이후 기존 치과용 접착제를 사용해 성능을 비교한 결과 연구진은 접착 성능이 열배 이상 향상되고 치아 수복재의 내구성도 50% 이상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두꺼운 접착제를 새로 만드는 대신 홍합에서 가져온 분자 구조를 이용해 재료의 ‘표면’을 바꾼 것이다. 재료의 전체 조성을 크게 바꾸지 않고 나노미터 수준의 계면을 설계하는 것만으로 성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재료공학적으로도 흥미로운 사례다.
이러한 특성은 의료 분야에서 더욱 중요하다. 우리 몸속은 혈액과 체액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상처나 뼈에 사용하는 접착제 역시 젖은 환경에서 작동해야 한다. 동시에 너무 단단하기만 하면 움직이는 조직을 따라가지 못하고 쉽게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생체 접착제에는 접착력뿐 아니라 유연성, 인성, 생체적합성 같은 여러 성질이 동시에 요구된다. 홍합을 모방한 고분자와 하이드로젤이 조직 접착이나 인공 조직과 같은 생체재료 후보로 연구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연구자들은 홍합의 접착 방식을 다른 고분자에 적용해 생체재료와 인공 힘줄, 인공장기 등으로 확장할 가능성도 연구하고 있다.
홍합 모방 접착제가 보여주는 재료공학의 핵심은 단순히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다. 홍합이 물속이라는 불리한 환경에서 어떻게 표면에 붙고, 힘을 견디며, 결합을 유지하는지를 분자 수준에서 분석한 뒤 필요한 원리만 골라 새로운 재료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재료의 성능을 생각할 때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먼저 떠올리지만 홍합의 사례에서는 분자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고 표면과 어떤 작용을 하는지 역시 재료의 성질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즈덤 네이처] 재료의 성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조와 원자·분자의 결합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재료부터 기존 소재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재료공학 기술을 살펴봅니다. 또한 컴퓨터와 AI를 활용해 원하는 성질의 물질을 역으로 설계하는 재료정보학까지 탐구하며, ‘우리는 어떻게 세상에 없던 새로운 재료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알아봅니다. 우성훈 기자의 ‘위즈덤 네이처’에서 첨단 기술의 출발점이 되는 재료의 원리와 혁신, 그리고 미래를 재료공학을 만나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