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위즈덤 아고라 / 윤채원 기자]올해 2월 20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통상 정책 수단인 IEEPA(The International Emergency Economic Powers Act) 기반 관세를 위헌으로 선언하여 관세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이러한 법치와 권력 분립의 재확인에도 불구하고, 판결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통상법 122조를 근거로 150일간의 10% 국제 관세를 선언하고, 바로 다음 날 이를 15%로 상향했다. 또한 통상법 232조(국가안보 기반 관세), 301조(불공정 무역 관행 기반 관세) 등 상향 관세를 유지하기 위해 법적 권한을 총동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결국 이번 판결이 밝혀낸 것은 트럼프 2기 정권의 확고한 관세 정책 방향성과, 그로 인한 통상 불확실성의 심화이다. 이제 각국은 미국 주도의 무역 질서가 더 이상 안전망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저마다의 생존 전략을 찾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포퓰리즘과 그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학교에서 사회 시간에 우리는 자유무역이 왜 모두에게 이로운지를 배웠다. 각국이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서로 교환하면 전체의 부가 늘어난다는 비교우위의 논리였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질서와 국제 기관들을 통한 자유무역은 세계 경제 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질서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고, 국가들은 경제적 효율성보다는 경제 안보를 더 중시하는 보호무역 정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트럼프 2기 정권은 자유무역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자국 유권자들의 지지를 결집하기 위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1차원적으로 미국의 우위 질서를 유지하려 하며, 법적 권한을 남용해 보복 관세를 남발함으로써 글로벌 통상 질서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 정책의 배경에는 분열된 유권자들의 불만을 흡수하려는 정치가 자리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복잡한 현실을 ‘우리 대 그들’이라는 단순화된 구도로 환원했고, 무역 정책은 그 도구가 되었다. 본래 무역 정책은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균형을 찾는 과정이지만, 오늘날 국제 통상 질서는 이러한 원칙보다 국내 정치적 계산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자유무역에서 멀어지고 보호무역으로 가기 시작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8년 금융위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 주택 시장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시작됐다. 신용등급이 낮은 저소득층에게 무분별하게 제공된 주택담보대출이 부실화되면서 금융 시스템 전체가 연쇄적으로 흔들렸고,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을 기점으로 전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졌다. 하지만 금융 위기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월스트리트 대형 은행들은 정부 구제금융으로 살아남은 반면, 이미 수십 년간 제조업 일자리를 잃어온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았다. 이를 계기로 자유무역에 대한 불만이 표면화되면서 해외 생산 이전으로 러스트벨트 일자리가 급감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실제로 중국산 수입품 증가만으로 미국 제조업 일자리 약 200만 개가 사라진 것으로 추산된다. (Autor, Dorn & Hanson, 2016)
트럼프 1기(2017~2021)는 그 민심을 등에 업고 완전히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TPP에서 탈퇴하고 WTO의 분쟁 해결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키며 다자 규범 체제를 무력화했다. 2018년에는 중국산 수입품에 통상법 301조를 통한 관세를 부과하며 미중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기업들은 중국에서 베트남, 멕시코, 방글라데시 등으로 생산기지를 옮기기 시작했고, 이것이 글로벌 공급망의 첫 번째 대규모 재편이었다. 다만 이러한 관세 정책으로 인해 미국 가구당 연평균 약 1,700달러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PIIE, 2019) 이 시점부터 무역 정책은 경제 정책이 아니라 정치 동원의 핵심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후 대규모 유동성 공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경제적 불안을 심화시켰고, 그 불안은 다시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졌다.
바이든 행정부(2021~2025)는 트럼프 관세의 상당 부분을 유지하되 접근 방식을 바꿨다. 동맹국들과 공동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전략이었다. IRA(인플레이션감축법)와 CHIPS법을 통해 반도체와 청정에너지 분야의 공급망을 미국 내로 끌어오려고 했다. CHIPS법 하나만으로도 미국 내 반도체 공장 건설에 약 2,800억 달러의 민간 투자가 발생했다. (SIA, 2024) 바이든 행정부도 표면적으로는 다자주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트럼프 1기와 같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소외하는 것이었다.
트럼프 2기(2025~)는 이러한 정책들을 더욱 공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25년 4월 2일 스스로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라고 명명한 행정명령으로 거의 모든 교역국에 높은 상호관세를 부과했다. 이후 90일 유예, 협상, 인상, 재협상이 반복되면서 기업들은 어떤 국가에서 무엇을 얼마에 생산해야 할지 기초적인 계획을 세우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는 단순한 통상 정책의 변화가 아니다. 2025년 갤럽 조사에서 스스로를 ‘중도’라고 밝힌 미국인 비율이 역대 최저인 34%를 기록했다. 무역이 가져온 경제적 충격은 정치적 양극화로 전환됐고, 그 양극화가 다시 더 극단적인 무역 정책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Gallup, 2025)
이 일련의 변화가 전체적으로 글로벌 공급망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려면 공급망이 원래 어떻게 설계되어 있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기업들은 ‘어디서 가장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생산지를 결정했다. 부품은 여러 나라에 분산되어 있고, 조립은 인건비가 낮은 곳에서 하며 완제품을 소비 시장으로 운반하는 구조였다. 이 시스템은 효율적이었지만 팬데믹 때 자국에서 마스크 하나도 충분히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각국 정부는 글로벌 공급망을 통한 경제적 효율보다 공급 안정성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중 무역 전쟁으로 시작된 미국의 공격적인 관세 정책이 더해지면서 공급망 재편은 심화되었다. 처음에는 경쟁국가에 대해서였지만 이제는 동맹국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의 대외 관세 체계는 친미 성향의 소국들, 선진 동맹국들, 신흥 제조 허브 등으로 나뉘었다. 맥킨지는 이러한 지정학적 분절화가 심화될 경우 글로벌 무역 손실이 최대 3조 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McKinsey Global Institute, 2023) 또한 HSBC 설문에 따르면 미국 기업의 67%가 공급망이 바뀌면서 부족해진 운영 자금을 메우기 위해 단기 대출 등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SBC, 2025) 즉 공급망을 바꾸는 데 드는 비용 자체가 기업 경영의 새로운 부담이 되고 있다.
각국은 이 상황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정면 대결 대신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갈륨, 게르마늄 등 전기차·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의 수출을 제한해 미국을 압박하는 한편, ASEAN과 EU로의 수출을 늘리고 아프리카 43개 최빈국에 무관세 정책을 적용하며 미국이 빠진 무역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있다. 대만은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독보적 위치를 활용하고 있다. 전 세계 첨단 반도체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TSMC 없이는 미국의 주요 기술 기업들도 제품을 만들 수 없다. 대만은 이 협상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2,500억 달러 투자 약정을 체결하고 TSMC 애리조나 공장 건설을 가속화하며 관세 압박을 완화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구조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두 나라 모두 안보 동맹으로는 미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아 어느 한쪽을 완전히 선택하기 어렵다는 공통된 딜레마를 안고 있다. EU는 2025년 7월 미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해 자동차·의약품·반도체에 15% 관세를 적용받는 것으로 정리했지만, 그린란드 사태와 NATO 분담금 갈등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무역을 넘어 안보 영역에서도 흔들리고 있다. 멕시코는 USMCA라는 기존 무역 협정이 있음에도 25% 관세가 부과되면서 협정의 실효성 자체가 의문에 처했고, 브라질은 관세가 10%에서 50%로 급등하며 남미 전체로 불확실성이 확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올해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캐나다 총리 마크 카니는 현재의 국제 질서를 “전환이 아닌 균열의 시대”라고 하며, 중간 강대국들이 공동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협상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발언에 캐나다에 100% 관세를 위협하며 반응했다.
미국은 다자 규범 대신 일대일 협상으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고, 중국은 미국을 배제한 별도의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으며, 중간 강대국들은 새로운 다자 무역 체계를 만들어 독자적인 협상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앞으로 어느 방향이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향후 글로벌 공급망과 무역 질서의 모습이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역 질서의 혼란이 단순히 정책적인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적 양극화를 낳고, 양극화는 포퓰리즘을 강화하며, 포퓰리즘은 다시 더 극단적인 보호무역 정책을 만들어내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양극화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한 어떤 정책과 협정도 정권에 따라 뒤집힐 수 있다는 현실이다. 따라서 중간 강대국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완전히 휘둘리지 않고 규칙과 가치 기반의 다자 무역 체계를 함께 지켜내려는 중견국들의 연대가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대안일 수 있다.
[위즈덤 이코노미] 최근 국제 무역의 재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기업과 기업,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는 경제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긴밀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국제 경제는 이러한 연결을 통해 같이 발전하지만, 그 연결을 통해 위험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위즈덤 아고라 윤채원 기자의 ‘위즈덤 이코노미’는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분석하여 독자와 함께 변화하는 세계를 보다 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배우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