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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 정의를 위한 외침, 4.19를 기념하며

Illustration by Hyunjoo Choung

by Yeonju Woo (DC Year 11)

5월 달력을 보면 5일 어린이날과 이어 8일 어버이날, 21일 부부의 날과 같은 여러 가지의 기념일이 있다. 다양한 기념일과 공휴일이 겹쳐 누구나 들뜨기 마련이다. 그중 5월 10일은 유권자의 날로, 우리나라 최초로 민주적 선거가 실시된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를 기념하기 위해 생겼다. 왕정 치하에 있던 국민들이 처음으로 유권자가 되어 권리를 행사하고 자신의 한 표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선거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날이다. 만 18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자신들을 위해 활동하게 될, 즉 자신을 대표할 사람을 뽑아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고, 나의 생각을 잘 반영해서 정치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대표자를 뽑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최초의 선거에서 투표율 95.5%에서 시작된 투표율은 계속하여 줄어들고 있다. 4월 19일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날이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목숨을 걸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민의 권리를 외쳤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1960년 선거에서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기 때문이다. 최초 개헌인 발췌개헌은 대통령 직선제가 핵심이었다. 1950년 총선이 야당의 승리로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 본인의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계엄령을 선포했다. 정부안과 국회안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으로 개헌을 단행한 것이다. 두 번째 개헌이었던 일명 ‘사사오입 개헌’은 헌법상 원래 2회까지만 가능했던 대통령 연임 제한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폐지하려고 한 개헌이다. 초대 대통령만은 중임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고, 1954년, 국회에서 비밀투표를 한 결과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나타났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⅔ 이상이었으므로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다. 투표 결과, 개헌 정족수에 1표가 부족해 부결이 선포되었는데, 재적의원 ⅔는 135.33… 명이므로, 136명 이상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틀 후인 29일에 ‘사사오입’이라는 논리를 펼치며 개헌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재적의원 203의 수학적 ⅔는 135.333···인데 0.333···은 0.5 미만으로서 수학의 사사오입(수를 반올림한 뜻)의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수이므로 203명의 ⅔는 135.333···명이 아니라 135명이다.”라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또다시 집권을 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4대 대통령 선거에서 종신집권을 위한 역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를 일으켰다. 완장 부대가 투입되어 심리적 압박감을 주며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민주적인 결과에 대해 시민들은 강력히 저항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도로를 꽉 채웠고 모두 다 한마음으로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외치며 시위대는 시청으로 향했다. 그러자 완전 무장한 경찰이 시민을 향해 사격하였고 115명이 사망하고, 727명의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었고 어린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최루탄과 총이 발사됐다. 그중 김주열이라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있었다. 1943년생인 김주열은 당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으로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 규탄대회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후 4월 11일 마산시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고, 이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지면서 주춤했던 시위대는 민주 정의를 위해 다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서울에서만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총궐기에 나섰고, 경찰의 계속되는 사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숨을 걸으면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마음으로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시민들을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였다. 하지만 4월 25일 이승만 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 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며 범시민적인 시위로 확대되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을 사임할 것이다”라며 마침내 하야를 발표했고 대통령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국민들의 위대한 승리였다.

‘나 하나쯤 안 해도 되겠지’, ‘다른 사람이 하는데 뭐!’라는 생각으로 소중한 투표권을 버린다면 투표참여가 낮은 결과를 초래하고 그만큼 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에 묻힐 가능성이 높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가려면 현재와 미래의 유권자들은 꾸준히 정치참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리고 어렵다는 이유는 핑계일 뿐이고 평소에 관심을 갖고, 정치문화가 익숙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가족과 친구들과 같이 정치에 참여성이 왜 중요한지 이야기해본다면 분명히 처음과는 달리 투표권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알게 될 것이다. 헌법상 선거권은 기본적인 권리로 결정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나와있다. 지금보다 더 성숙한 나라로 거듭나는 것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투표권을 반드시 행사하고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정치 현실을 없애기 위해서는 4.·19 혁명의 정신을 잊지 않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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