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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찬사 받는 독립운동가

그들의 피같은 노력과 독립

[객원에디터 1기/안현주 기자] 가슴 아픈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 투쟁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 본 사건이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식민지가 되어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35년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는 역사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생기게 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다 1931년도에 김구를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모양으로 위조된 폭탄을 단상으로 던졌다.윤봉길 의사는 자폭하려고 다시 한번 폭탄을 작동시켰으나, 이는 불발되었다. 불발되던 찰나 일본 헌병들은 윤봉길을 강하게 제압하였다. 이후 윤봉길은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고 끝내,사망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의 시신을 바닥에 묻어둔 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하였고 이를 목격하고 들은 사람들은 일본을 향해 분노하였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냈다’ 라고 말을 하며 윤봉길을 극찬하였다. 

윤봉길 의사보다 더 일찍 일제강점기 시대 때 독립운동을 한 유관순 열사는 1919년에 독립운동을 하였고 1919년 3월 1일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체포되었다. 충청남도 목천군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개신교의 사애리시 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편입하였다. 그 뒤에 유관순은 3월 1일 독립운동과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천안에 내려가 또 한 번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이끌다가 친일파 정춘영에 의해 일제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간다. 그 당시 유관순의 부모님이 일본에 의해 사망하고, 유관순 또한 5년형을 받는다. 재판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 라고 말하며 의지를 들어냈다. 무차별적 폭행과 고문으로 사망한 유관순은 고문의 정도가 심해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절하였다. 다행이도 교장인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반환받아 장례를 치루어주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앞장 선 김구는 대한제국의 승려, 교사,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한인애국단을 이끌고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연임할 정도로 활발한 운동을 하였다. 1876년 8월 29일에 태어난 김구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지도와 찬례를 받고있다. 또한 다수가 진행한 투표에서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길렀으며 윤봉길 의사 또한 김구의 제자이다. 1900년 개화파 사상을 가지게 되며 1903년도에 개신교에 입교해 본격적인 애국개몽운동을 펼쳤다. 그 시기에 봉양학교,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활발한 교육 활동 또한 펼쳤다. 1911년도 신민회에 참가한 김구는 105인 사건으로 인해 징역 17년을 선고하게 되었고 1914년에 가출옥해  농촌에서 계몽운동을 하다 3.1운동 때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게 된다. 독립 이후에도 꾸준한 정치 활동을 하며 좋은 영향을 주고 이승만과 라이벌 구도를 만들었지만 끝끝내 암살당하게 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백범 김구-

일제강점기 시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존재하였으며 대한민국은 그들의 피흘리는 노력으로 독립을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일제강점기 시절의 사건으로 분노 하였으나,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에 찬사를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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