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 인간의 권리를 지키는 첫 걸음, 선거참여
by Yeonju Woo (DC Year 11)
민주주의는 ‘민중의 힘’을 뜻한다. 즉, 모든 성별과 인종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말이다. 선거는 민중이 정치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하고 쉬운 방법이며 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에 따라 대표자를 선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국민들을 위한 정책들이 실현되고, 국민의 요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선거는 중요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이 공정하게 투표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스위스에는 1971년에 처음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전 스위스 남성들은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면 아이들과 집안일을 소홀히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선거를 못 한다는 것의 의미가 아니었다. 여성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정치인들은 여성을 위한 법안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또한, 모든 법적 권리는 남편에게 있고, 투표권이 없는 여성들은 하인과 같았다. 이것은 참정권이 정치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하고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투표를 하지 못하면 나를 위한 법, 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을 잃게 된다. 투표권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세계가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은 데에는 대부분 50년에서 100년까지 걸렸다.
1830년대 후반, 영국에서는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남성들에게도 투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차티스트 운동’이 있었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귀족, 부자에게만 선거권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인권마저 빼앗기며 살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투표권을 얻기 위해 저항을 하였다. 이 운동에 주동자들은 국민청원을 하며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 무기명 비밀 투표, 동등한 선거구 설정, 하원 의원의 재산 자격 철폐 등을 요구했고, 단기간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점차 선거권이 확대되었다.
남성들이 점차 선거권이 확대되며 권리를 찾자 여성들도 참정권 운동을 시작하였다. 20세기 초까지 여성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아 남편의 소유물과 같았던 인생에서 벗어나 억압과 불평등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믿었다. ‘Suffragettes’는 투표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활동이었는데 투표권을 얻는 길은 험한 길이었다. 여성인권 활동가들은 정신병자, 가정에 무책임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며 감옥에 갔고, 급기야 경마장에 뛰어들어 자기의 목숨을 희생한 에밀리 데이비슨도 있었다. 에밀리 데이비슨이 처음부터 말에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하면서 9번이나 수감됐고, 고문을 당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자신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 투표권이 생길 거라고 생각을 해서, 1913년 6월 4일, 영국 엡섬 더비 경기장에서 왕의 경주마에 달려들어 마흔 살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투표권을 달라는 에밀리의 목소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녀의 숭고한 ‘희생’은 5년 후인 1918년에 30세 이상 여성들이 투표권을 인정받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후, 여성들은 의회로 진출해 불평등을 바로 잡았다. 영국에서 보통선거 이루어진 것은 30세 이상 여성들은 투표권을 인정받은 10년 후인 1928년이며, 이때부터 21세 이상 여성들도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흑인 투표권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863년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 이후 1870년에 흑인 남성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지만, 각종 규제로 흑인들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문맹 실험을 통해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을 정하자며 흑인들에게는 ‘비누에 있는 방울 수가 몇 개인지 맞추어 보시오’ 등 말도 안 되게 어렵고 알 수 없는 문제를 내며 투표권을 제한했다. 반면, 백인들에게는 ‘오른손에 있는 손가락이 몇 개인지 쓰시오’ 등 아주 쉬운 문제를 냈고 이런 결과는 흑인과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각종 법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1965년 3월 7일,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비폭력 흑인 인권운동이 시작되었고, 불평등에 맞서 싸우던 흑인들은 무자비한 폭력 진압, 최루가스를 던지는 경찰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감옥에 가두는 말도 안 되는 행위도 하였다. 피의 일요일이 일어난 지 이틀 후,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하여 2차 행진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백인들까지 합세했고, 그리하여 총 2500명이 2차 행진에 참가하였다. 과격해진 시위대는 폭력을 행사했고 이번에는 백인 희생자도 발생하였다.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반대 여론이 확산되었고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은 3차 셀마 시위에 자신의 호위병을 보내며 시위는 마무리되었다. 이후 대통령은 모든 사람의 투표권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하였고, 백인들과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며 노예 취급을 받았던 흑인들은 마침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게 되었다.
보통선거를 위하여 누군가는 목숨을 희생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잃었다. 투표권이 없다면 시민이 아니다. 이전에 여성들, 노동자들, 흑인들처럼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면 편향된 정책이 수립된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그만큼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정치가 어렵고 귀찮다는 이유로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피와 땀으로 이뤄낸 보통선거를 너무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거는 자신의 ‘권리보장’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위한 교육을 하고, 특히 젊은 층이 흔히 접할 수 있는 매체를 이용해 선거의 기능과 선거에 왜 참여해야 하는지, 또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