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위즈덤 아고라 / 윤채원 기자]미국 국채란 미국 정부가 돈을 빌릴 때 발행하는 증서이다. 개인도 살 수 있지만, 주로 대형 은행, 연기금, 외국 정부 같은 기관들이 사들인다. 미국 국채는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아서 전 세계 금융 시장에서 기본적인 자산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최근 이 국채 시장에 은행도, 국가도 아닌 새로운 큰손이 등장했다. 바로 1달러짜리 디지털 토큰을 발행하는 회사들이다. 이 토큰을 스테이블코인이라고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마치 비트코인처럼 블록체인 위에서 작동하지만, 결정적으로 가격이 움직이지 않고 항상 정확히 1달러에 고정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렇게 보장되는 안정성 때문에 전 세계 수억 명이 국경을 넘는 송금, 암호화폐 거래, 결제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쓴다. 그런데 발행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1달러짜리 토큰을 1억 개 찍어내려면 실제로 1억 달러가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갑자기 1달러를 돌려달라고 하면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돈을 그냥 금고에 쌓아두면 손해다. 그래서 발행사들이 택한 방법은 미국 단기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다. 안전하고, 이자도 붙고, 필요하면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5년 기준,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2,5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스테이블코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10년대 중반이다. 초기에는 암호화폐 거래소 안에서만 쓰이는 내부 결제 수단에 가까웠다. 비트코인을 팔고 달러로 바꾸는 대신,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꿔두면 가격 하락 위험 없이 암호화폐 생태계 안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쓰임새는 빠르게 넓어졌다. 은행 계좌가 없는 인구가 많은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에서는 달러 자산을 보유하는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이 퍼졌다. 자국 통화 가치가 급락할 때 스테이블코인으로 자산을 보호하는 사례도 늘었다. 국경을 넘는 송금 수수료가 기존 은행보다 훨씬 낮다는 점도 확산을 이끌었다. 2019년 약 20억 달러에 불과했던 스테이블코인 유통 규모는 2025년 1분기 기준 2,300억 달러를 넘어섰다. 6년 만에 100배 이상 성장한 셈이다. 이렇게 확장되고 있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테더(USDT)와 서클이 발행하는 USDC 두 종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준비 자산으로 미국 단기 국채를 선택하면서, 두 시장은 더 깊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스테이블코인을 더 많이 쓸수록 발행사는 준비금을 더 많이 쌓아야 하고, 그 돈은 국채 매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코인 유통량이 곧 국채 수요로 직결되는 셈이다. 2025년 6월 말 기준 테더와 서클은 약 1,300억 달러어치의 미국 단기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전체 단기 국채 시장의 약 2.25%에 해당하는 규모다. 절대적인 수치만 보면 아직 크지 않다. 수천 개의 주식과 채권에 분산 투자하는 펀드인 뮤추얼 펀드가 약 4조 5,000억 달러, 생명보험사 같은 보험사가 약 6,500억 달러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의 보유량은 아직 한참 못 미친다. 그러나 추세가 다르다. 중국, 일본처럼 전통적으로 미국 국채를 대량 보유해온 나라들은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보유 국채를 언제든 줄일 수 있고, 실제로 최근 미국의 관세 정책이 격화되면서 이런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반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코인을 더 발행할수록 의무적으로 국채를 더 사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구조적인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매수를 이어가는 주체라는 점에서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국의 혁신 기술 중심 자산운용사 ARK 인베스트는 2030년까지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1조 4,0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는데, 이 경우 테더와 서클의 국채 보유액은 6,600억 달러를 넘어 중국의 현재 미 국채 보유량에 근접하게 된다. 미국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가 “스테이블코인 생태계의 성장이 국채 수요를 끌어올려 정부 차입 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도 이 맥락에서인데, 갈수록 늘어나는 국가 부채를 안정적으로 소화해줄 새로운 매수자가 생긴다는 점에서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반길 만한 흐름이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이 항상 1달러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2022년 테라·루나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테라는 준비 자산 없이 알고리즘만으로 1달러 가치를 유지하려 했다. 수요와 공급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방식이었는데, 갑자기 대규모 매도가 시작되자 알고리즘이 버티지 못했다. 한때 시가총액 40조 원을 넘겼던 테라는 며칠 만에 사실상 0원이 됐다. 준비 자산 없이 설계된 스테이블코인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테더나 USDC처럼 실제 준비 자산을 보유하는 방식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히 위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환매를 요청하면 발행사는 준비 자산을 급하게 팔아야 한다. 은행이라면 예금보험제도(FDIC)가 있고, 위기 때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는 그런 안전망이 없다. 이 구조는 2008년 금융위기 때 뱅크런으로 무너진 은행들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테더의 준비 자산 구성도 불투명성 논란이 있다. 테더는 준비금의 약 20%를 회사채, 금, 비트코인 등 비유동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다. 급격한 인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 자산들은 빠르게 현금화하기 어렵다. 또한 만약 두 회사에 대한 대규모 인출 사태가 발생해 보유 국채를 한꺼번에 시장에 내던진다면, 국채 가격이 급락하고 금리가 치솟을 수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스테이블코인에서 자금이 유출될 경우 단기 국채 수익률이 10일 이내에 6~8베이시스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디지털 자산 시장의 충격이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는 미국 국채 시장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위험을 인식한 미국은 2025년 7월 18일 GENIUS Act(Guiding and Establishing National Innovation for U.S. Stablecoins)를 법제화했다. 상원에서 68대 30, 하원에서 308대 122의 양당 찬성으로 통과된 이 법안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 스테이블코인 규제 법률이다. 핵심 내용은 스테이블코인 1달러를 발행하려면 반드시 1달러어치의 안전 자산을 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하고, 허용되는 준비 자산은 단기 T-bill, 레포 계약, 정부 머니마켓펀드 등으로 제한되며, 발행사는 보유 준비 자산 내역을 주기적으로 공시해야 하고, 500억 달러 이상을 발행한 발행사는 연간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제화 이후에도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가장 첨예한 쟁점은 이자 지급 허용 여부다. GENIUS Act는 발행사가 코인 보유자에게 직접 이자를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결제 수단이 아닌 투자 상품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거래소를 통한 우회 지급은 여전히 가능해 사실상 규제에 구멍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행권은 이 허점을 메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암호화폐 업계는 이를 기득권의 경쟁 차단으로 보고 있다. 소비자 보호 장치가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한 암호화폐 결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시장 변화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2,500억 달러 규모의 디지털 달러 생태계는 이미 미국 단기 국채 시장과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성장할수록 미국 정부의 차입 비용이 낮아질 수 있다는 낙관론이 있는 반면, 암호화폐 시장의 충격이 국채 시장으로 번지는 새로운 경로가 만들어졌다는 경고도 공존한다.
[위즈덤 이코노미] 최근 국제 무역의 재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기업과 기업,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연결은 긴밀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경제는 각 주체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국제 경제는 연결을 통해 발전하지만, 그 연결을 통해 위험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국제경제학은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분석하며, 각 나라의 무역·금융·산업 정책 등을 통해 세계 경제의 흐름을 이해하는 학문입니다. 위즈덤 아고라 윤채원 기자의 ‘위즈덤 이코노미’은 복잡하게 얽힌 국제 경제의 연결 관계를 통해 독자와 함께 변화하는 세계를 보다 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배우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