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의 역사적 의미

Illustration by Taeho Yu

by Seohyun Kim 2007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가혹한 통치를 당하며 힘들게 살아왔다. 1945년 일제강점기는 끝났지만 여전히 위안부, 강제 징용 등 일본은 보상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고 있어 그때의 아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었고 2018년 대법원은 일본 기업에 1억 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 같은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들에 대한 청산과 후손들의 재산도 귀속하지 못하였고, 독립 영웅들에 대한 예우도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 광복절에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1920년 일본에게 나라를 잃은 후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장군을 낳고 7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농사꾼이던 아버지도 장군이 9살 때 돌아가셨다. 장군은 15살 때 나이를 2살 올려 나팔수로 입대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은 백성을 수탈하였고, 장교들은 일반 병사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횡포를 일삼았다. 이에 장군은 참지 못하고 결국 주먹다짐 끝에 상관을 죽여버렸다. 그래서 1890년부터 약 1년 반 가량 세상을 피해 금강산 신계사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온갖 궂은일을 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그러다가 단양 이 씨를 만났고 둘은 산에서 내려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 살았다. 이때가 홍범도 장군 인생에서 가장 평온했던 시기이다. 홍범도 장군은 신계사에 있을 때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 대사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비롯하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듣게 되었다. 이 같은 경험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침략하는 일제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던 장군의 반일 의식을 더욱 증폭시켜 갔다. 그 뒤 장군은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한 후,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 사이 홍범도 장군을 잡기 위해 일본인들이 그의 아내를 잡아 고문했고 혀를 깨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아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다른 아들도 결핵에 걸려서 죽었다. 이렇게 홍범도 장군은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아픔을 뒤로하고 만주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리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또 김좌진과 독립군 주력 부대가 북간도 청산리 일대에서 5박 6일 동안 일본군과 치른 청산리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됐다.

식민지 시절 우리 국민들은 많은 시련을 겪었다. 1920년 독립군의 승리에 화가 난 일본은 간도 지역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학살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또한, 1937년 연해주에서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 18만 명이 스탈린의 명령하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고려인 강제 이주 사건이 있었다. 러시아는 고려인이 일본의 간첩 노릇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려인을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당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벼농사이다. 카자흐스탄에는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아랄해로 흐르는 시르다리야 강이 있는데 고려인들이 이곳을 따라 많은 대규모 농장을 개척하여 벼농사 지대를 형성했다. 이때 카자흐스탄에 우리나라의 벼 재배 기술 등이 전해졌다. 덕분에 크질오르다에는 벼 이삭 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에 가서도 우리말과 문화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죽어서도 묘를 동쪽으로 세우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1938년 홍범도 장군은 크질오르다에 집을 얻어 병원 경비를 서며 생계를 유지했다. 같이 이주당한 고려인 동포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일터였던 고려극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의병’을 즐겨 보았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해방을 앞두고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카자흐스탄에 묻혔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1992년 카자흐스탄과 국교 수립 이후 꾸준히 논의됐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2013년 봉환을 건의했지만 카자흐스탄이 남북한 동시 수교국인 이유로 외교 문제가 우려되고 일부 고려인들의 반대로 봉환이 유보됐다. 그러다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방문 시 고려인 동포들의 동의를 얻어 카심 조마르트 토가예프 대통령에게 “항일투쟁의 국민 영웅을 고국으로 봉환해야 한다”라고 적극적으로 요청해 봉환에 이르게 된 것이다.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우리나라로 모셔왔는데 그게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카자흐스탄에 남아있던 고려인들이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여러 고난을 거치면서도 끊임없이 관리해온 덕분이다.  

이번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는 국가와 국민이 끝까지 보호하고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실천한 것이다.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144구의 유해가 봉환되었지만 아직도 고국으로 봉환되지 못한 유해가 공식적으로 150여 기다. 해외 먼 타국 땅에 묻혀 있는 독립 영웅들을 조국으로 모시는 일은 국가와 후대의 마땅한 책무이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홍범도 장군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대한 독립군을 이끈 사령관이었지만 일반 장병들과 함께 싸우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리더십으로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어려운 환경과 가족을 잃은 아픔에서도 나라를 되찾으려는 굳은 신념을 보여준 정신은 후세에 큰 울림을 남긴다. 

이번 유해봉환을 계기로 우리나라와 카자흐스탄이 더 가까워졌고 나중에 신북방정책의 핵심 파트너로 카자흐스탄과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는 끝났지만 나라를 잃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다시 한번 느꼈고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Leave a Reply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