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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영웅,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의 9대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은 2016년에 서거했지만, 현재까지도 많은 태국인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출처 : Freepik>

[객원 에디터 1기 / 김권주 기자] 1927년 12월 5일에 태어나 2016년 10월 13일에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은 태국의 아홉 번째 국왕이다. 짜끄리 왕조의 라마 9세인 푸미폰 아둔야뎃 이름의 뜻은 ‘땅의 강함, 비교할 수 없는 힘’이라는 의미가 있다. 아둔야뎃의 정식 명칭은 프라밧솜뎃 프라뽀라민타라 마하푸미폰아둔야뎃 보롬마나타보핏(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รมินทรมหา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ฯ บรมนาถบพิตร)과 프라밧솜뎃 프라보롬차나까티벳 마하푸미폰아둔야뎃마하랏 보롬마나타보핏(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บรมชนกาธิเบศร มหาภูมิพลอดุลยเดชมหาราช บรมนาถบพิตร)이다. 푸미폰 아둔야뎃은 공식적으로 “대왕”이라고 불리는 태국국왕이었다. 짜끄리 왕조의 초대 왕인 붓다 요드파 출라로케 국왕을 제외하고 대왕이라는 수식어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1946년에 즉위했고, 70년 동안 태국을 집권하였다. 생전 그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보다 5년 이상 더 많은 70년 동안 태국을 집권하며 세계 최장기 군주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태국 시민들이 그를 존경하고 칭송하는 이유는 단지 최장기 집권뿐만이 아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렸다. 태국은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이자 부정부패가 가득한 나라이다. 하지만 푸미폰 아둔야뎃은 부정부패 관련한 뉴스가 단 한 개도 없었고 사생활도 아주 깨끗했으며 왕족의 관행이었던 일부다처제도 시행하지 않고 단 한 명의 부인만을 왕비로 임명했다. 그는 가난한 국민들을 자주 찾아다녔고, 가난한 국민 중 다수가 농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국의 새마을 운동처럼 경제 개발을 위해 로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로열 프로젝트에는 막대한 왕실 재산이 투입되었다. 로열 프로젝트는 태국 수도권 외에 있는 농촌에 수력발전소와 저수지를 건설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물소를 빌려주는 물소은행을 설립했으며, 농업 기술의 발전을 위한 농업 기술 연구소를 개설했다. 또한 당시 태국 동부와 북부 일부 지역들에서는 극심한 가난을 포함하여 인신매매와 불법 마약 재배 등의 행위들로 인해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발 뻗고 나섰다. 마약을 재배하는 불법 조직들에 의해 강제로 노동 당하며 양귀비를 재배해서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던 고산족들을 방문하여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하는 기술을 전수하였고, 농업을 양귀비 대신의 수단으로 대체하도록 하고 왕실 재산으로 꾸준히 지원해주었다. 그의 노력 덕에, 농민들은 양귀비 같은 마약들로 벌어들이는 것보다 농업으로 더욱 더 높은 소득을 얻게 되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태국의 꿀 재배 방법 또한 발전되며 현재는 태국의 대표 관광 상품으로 자리하고 있다. 1959년, 고산족들에게 농업 기술을 전수한 후에도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계속하여 고산족들에게 관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치앙마이 북부의 고산족 중 소수 종족인 차오카오족(chao-khao)의 복지위원회를 설립하고 그들의 삶을 훨씬 개선해 1988년에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유엔으로부터 제1회 ‘인간개발 평생 업적상’도 수상했다.

현재까지 태국의 국민들에게 칭송받으며 존경받는 9대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보다 현재 10대 왕의 모습은 전혀 부자 같지 않고 다르다며 비교되어 비난받고 있다. 마하 와치랄롱꼰 (มหาวชิราลงกรณ)은 라마 10세로 정식 명칭은 프라밧솜뎃 프라뽀라멘타라 라마티보디시신 마하 와치랄롱꼰 프라와치랄끌라오 짜오유후아( 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รเมนทรรามาธิบดีศรีสินทรมหาวชิราลงกรณฯ พระวชิร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이다. 그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시리낏 왕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아둔야뎃 국왕은 그를 왕세자로 삼았다. 하지만 엄청난 업적을 남긴 아버지와 다르게 마하 와치랄롱꼰은 부정부패와 사생활 스캔들이 가득한 왕이었다. 그는 총 3번의 이혼을 겪었다. 1977년, 소암사왈리와 결혼하여 공주 한 명을 낳았지만 그는 여배우인 수자리니와 바람을 피기 시작했고 수자리니와 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1993년 7월 둘은 이혼하게 된다. 소암사왈리와 이혼한 후, 마하 와치랄롱꼰은 1994년 2월에 수자리니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후인 1996년, 그는 수자리니와도 이혼하게 된다. 그리고 와치랄롱꼰은 2001년 2월 스리라스미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13년만인 2014년, 그녀와도 또 이혼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대관식을 3일 앞두었던 2019년 5월 1일, 와치랄롱꼰은 수티다 왕비와 결혼했다. 하지만 국민들이 그를 비난한 것은 단지 그의 사생활 때문이 아니었다. 작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여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도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은 코로나를 피하고자 20여명의 첩을 데리고 휴가를 떠나 독일에 머물렀다.

태국 국왕 중 가장 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태국 국왕 중 가장 국민들에게 미움받고 비난받는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 두 국왕이지만, 각자 나라를 통치하고 국민의 안위를 생각하는 방식은 너무도 달랐다. 항상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사생활이 깨끗한 아버지와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문란한 사생활을 가진 아들, 아들로 인하여 더욱 푸미폰 아둔야뎃의 생전 업적이 강조되고 빛난다고 볼 수 있다. 아들과의 비교를 제외하여도 푸미폰 아둔야뎃의 생전 업적은 정말 놀라운 결과를 거두었고, 그로 인해 그는 국민에게 칭송받을만한 대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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