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는 어떻게 분단 국가가 되었을까?
분단 국가인 키프로스의 역사…
키프로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객원 에디터 3기 / 이석현 기자] 나누어진 나라 혹은 분단국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남한과 북한만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지구 상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분단국가는 바로 서아시아 지중해 남부에 있는 작은 섬나라인 키프로스다.
키프로스는 지리적인 이유로 서아시아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민족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그리스와 가깝기에 남유럽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수도는 니코시아라는 도시이고 인구의 78%가 그리스인, 17%가 터키인, 그리고 아르메니아인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키프로스 섬에 자리 잡은 공화국이다. 북부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이 통치하고 있다. 양측은 분단국가로 몇 번이나 통일 협상을 진행하였으나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분단국가가 되었을까?
1473년 키프로스는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고 1489년 공식적으로 베네치아에 합병되었다. 이 합병으로 300년 간의 루지냥 통치가 끝났다. 그 3세기와 이후 82년의 베네치아 통치 기간 동안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리스 키프로스의 농노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토착 문화, 언어 및 종교를 유지했다. 80년의 베네치아 통치 기간 동안 오스만 튀르크 인들은 키프로스의 지역 사회를 가차 없이 습격하고 약탈했다. 1539년, 터키 함대는 항구 도시인 리마솔을 파괴했다. 베네치아는 니코시아, 키레니아, 파마구스타를 요새화했지만 다른 도시와 마을은 공격적인 터키인에게 쉬운 먹이가 되었다. 습격은 1570년 터키의 전면적인 침공을 예고했다. 1570년 7월 2일, 6만 명의 군대가 리마솔 근처에 상륙한 후 즉시 니코시아로 진격했다. 두 달 후인 1570년 9월 9일에 이 도시는 승리한 약탈로 2만 니코시아인을 죽이고 모든 교회와 공공건물을 약탈한 투르크에게 함락되었다. 키레니아는 총을 쏘지 않고 쓰러졌다. 그러나 투르크 군은 1571년 8월까지 단호한 방어를 펼친 파마구스타를 장악하지 못한다.
또다시 시간이 지나 1850년대 중반 오스만 제국은 심각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오스만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북쪽의 러시아는 세력을 강화하고 남쪽으로 공격적으로 진격하여 차르의 제국을 따뜻한 항구로 확장하려고 시도했다. 동부 지중해에 기지를 원했던 영국은 1878년 키프로스 협약에서 터키와 키프로스를 관리하고 러시아의 팽창으로부터 오스만 제국을 보호하기로 합의했다. 처음에는 영국인이 이오니아 제도에 끼쳤던 긍정적 영향처럼 키프로스와 그리스의 통합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리스인들이 환영했다. 그래서 키프로스에 그리스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키프로스는 1974년 그리스 정부의 지원을 받은 섬에 대한 군사 쿠데타에 대한 대응으로 터키가 북쪽을 침공하면서 분단되었다. 섬은 효과적으로 분단되어 북부 3분의 1은 터키계 키프로스 정부가, 남부 3분의 2는 그리스계 키프로스 정부가 관리했다. 유엔군이 두 부분을 나누는 ‘그린라인’을 순찰하고 있고, 통일 회담은 더딘 진전을 보이고 있다. 과연 키프로스는 언제 분단국가에서 한 국가로 바뀔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