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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글로벌]베트남 전쟁, 미국은 왜 패배하게 되었는가

<언스플래쉬 제공>

[위즈덤 아고라 / 김여진 기자] 한국인의 자존감은 한민족이 겪어온 역사에서 비롯된다. 동아시아에 위치한 작은 반도에서 수많은 침략을 당하고도 끝까지 살아남은 국가지만 해방 후, 경제 성장을 이루고 선진국 반열에 당당히 오른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국가 중에는 한국인들과 맞먹을 정도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베트남 사람들이다. 필자는 “베트남 사람들의 자존심은 한국인과 맞먹을 정도이다.”라는 말을 12년 넘게 거주하면서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한국인들과의 기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려 하는 베트남 사람들을 여럿 봤다. 베트남인들의 자존심과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베트남 사람들은 기원전부터 중국의 침략을 받아왔고 근현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약 500번이 넘는 침략을 받아왔다고 한다. 특히, 근현대에 들어서는 베트남 전쟁으로 민족에 대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베트남인들의 자존심을 높이는 데에 일조하고, 반대로 미국인들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겨진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베트남 전쟁은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베트남 내의 전쟁이자 국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을 향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의 승리로 이어졌으며, 이는 북베트남 정권과 소위 ‘베트콩’으로 불리는 자들의 지리적, 전략적 방식으로 가능했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배하였고, 베트남인들은 1927년에 베트남 국민당,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조직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과 동시에 일본 제국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1941년, 호찌민의 주도로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이 결성되어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한 뒤,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한 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과 동시에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 항구에 함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는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때까지 총 9년간 지속되었다.

그해 7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의 4개국의 합의 아래 제네바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활약으로 휴전을 위한 제네바 협정이 성립됨으로써 북위 17도선을 잠정적 군사 경계선으로 하여,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프랑스군을 비롯한 모든 외국군은 즉시 철수할 것이 결정되었다. 분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국경선을 위한 비무장 지대(DMZ)를 설정하고, 2년 뒤 선거를 통해 통일을 시도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1955년에는 남, 북베트남이 서로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등의 문제로 선거가 무산되었고, 이후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면서 협정은 무의미해졌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개입은 964년 8월 2일과 4일에 벌어진 통킹만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미사일 구축함 매덕스가 북베트남 해안에서 정찰 작전을 수행하던 중 북베트남 군함이 매덕스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무력 충돌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미국은 북베트남의 반군과 하노이 정권을 압박함과 동시에 남베트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 

구정 대공세는 1968년 1월 30일부터 2월 24일까지의 베트콩의 기습공격으로, 설을 맞아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름을 따왔다. 공세는 미군과 남베트남국이 휴전을 맞아 경계가 소홀해진 틈을 활용하여 휴전선에 위치한 공격 대상 도시들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공세는 다수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어 놀라운 규모의 충격을 사이공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끼쳤다. 전략적으로는 베트콩의 패배로 끝났지만, 미국 내부에서는 전면적인 승리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충격과 혼란을 초래했다. 따라서 미국 내부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격렬히 일어났고, 이후 미국이 전쟁에서 철수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73년, 베트남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미국과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남 해방군 간에 파리조약이 체결되었다. 해당 조약은 미군의 전격 철수와 함께 남-북베트남 사이의 평화도 포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파리조약에 따라, 미군은 60일 이내에 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했고, 1973년 3월 29일에는 마침내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철수한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은 함락된다. 이에 따라 남베트남은 1975년 7월 2일 무조건 항복, 1976년 7월 2일에는 정식 통일되며 공산주의 국가로서 전락하게 된다. 

이렇듯, 초기에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에서의 내전의 성격을 띠었으나,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고 전쟁은 국제사회로 확장되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표면적 이유인 통킹만 사건을 제외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베트남은 동아시아와 서유럽에서의 미국의 냉전 정책이 교차하는 결정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력을 현저히 약화시켰고, 이에 따라 식민지 무역에서의 이익을 얻는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은 일본의 경제적 재건을 위한 핵심적인 배후 지역이었는데 이는 베트남이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과 라오스, 캄보디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고, 남중국해를 따라 가늘고 긴 형태의 국토로 외세의 침략에 쉽게 노출되는 지리적 특이점을 보유하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고자 한 프랑스의 이해가 걸려 있는 곳이 바로 베트남이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은 프랑스의 재정적 위기를 가중시켰으며, 프랑스는 미국의 서유럽 정책에 대한 일종의 ‘veto’권, 즉 모든 형태의 제안, 제도를 부인할 수 있는 거부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추구하는 독일의 재건과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 미국에 프랑스의 동의는 필수적이었다. 이와 같은 냉전의 정치경제적 논리는 한국 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미국이 프랑스에 대한 자원을 확대하며 베트남에 적극 개입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초래했다. 

더불어, 한국 전쟁을 계기로 한 트루먼 행정부의 베트남 개입 정책이 변화함에 따라 경제적 통합의 개념이 적용되었다. 맥마흔(McMahon)에 따르면 중국의 공산화 이후 트루먼 행정부는 국내정치적 압력과 도미노이론에 근거한 심리적 위협 및 압박감, 미국의 국제적 위치 및 위상 등의 요인들로 인해 트루먼 행정부의 봉쇄정책이 인도차이나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도미노 이론이란, 특정 국가에서 발생한 정치적 변혁이나 개혁 등이 주변국들에게 확산될 수 있다는 이론으로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될 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주변국들 또한 공산화될 것을 우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은 베트남의 지리적인 특이점에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공산화로 도약하고자 하는 북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 그리고 중국 위에 소련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또 다른 이유는 무능하고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의 실정이다. 베트남전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군사 강국이 항상 정치적, 군사적으로 성공하고 승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민족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던 베트남 민족에게 사회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북베트남 정부는 국민들을 설득해 베트남전쟁을 수행하는 원동력을 얻었다. 

반면 남베트남에서는 식민 지배를 유지하려는 프랑스에 의해 수립된 정부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소 독재정치를 실시하였고 관리들의 부패는 만연하게 되었다. 이어 4년간 쿠데타가 10번 발생하고, 독재정치가 계속됨에 따라 심각한 혼란 사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미국이 남베트남을 적극적으로 지지해도, 부패가 만연한 상태의 남베트남은 개혁적이고 자주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결국 직접 남베트남에 주둔하여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으며, 전쟁에 참여해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으로부터 공산화되는 일을 막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대 최고의 권력과 힘을 자랑하던 미국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자그마한 국가에 패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로는 첫째, 게릴라 전술을 고려하지 않은 미군의 전술 때문이다. 미군은 게릴라들이 은거하고 있을 곳으로 판단되는 지역은 탐색해 그들을 수색 및 격멸한다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작전은 민간인의 피해를 초래했을 뿐, 작전 중 민간인의 협력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북베트남군은 그들의 특기 기술과도 같은 게릴라 전술을 전개함으로써 미군의 정규전 능력을 상쇄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베트남의 지리적 특징이다. 북베트남의 게릴라 전술은 베트남의 지리적 특이점과 결합하여 독자적인 특징을 드러냈다. 20%의 남부 삼각주 평야 지대는 저지 및 늪지대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를 제외한 나머지 70% 이상이 무성한 열대 정글로 뒤덮인 산악으로 베트남 국토를 차지한다. 또한, 연평균 34℃를 넘나드는 무더위의 기온이 나타나는 기상 조건은 미군을 포함한 연합국에게 작전의 제한요소로 작용함과 동시에 북베트남 측의 게릴라들에게는 은거와 생존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게릴라들은 보급이나 지원이 없더라도 장기적인 저항이 가능하였고 이러한 지리적 특징은 군사적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마지막은 북베트남군의 구정대공세가 작용했다. 베트남의 최고의 명절은 뗏(Tet) 

으로 음력 설을 말한다. 현재까지도 뗏 기념으로 2주가 넘는 휴일을 보내기도 할 정도의 주요 이벤트이다. 당시 뗏 시기에는 전쟁 중에도 임시 휴전협정을 맺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가를 즐겼다. 미군은 이러한 베트남의 풍습이 1968년에도 시행될 것이라 판단하여 남베트남군의 수많은 병력은 휴가를 떠났고 미군도 경계 태세를 낮춘 상태였다. 미군의 예상과 달리 공세는 다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고, 공세 당시에는 충격을 가하는 듯했으나 전략적으로는 베트콩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공세 이후 미국의 희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됨으로써 미국인들의 반정부적 성향이 강화됐고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여론의 반대로 미군이 이후 전쟁에서 철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베트남 전쟁은 세계 최강인 미국이 최첨단 무기체계와 제한 없는 군수지원, 육․해․공 작전 등의 현대전술을 총동원했지만 끝내 미국이 패한 전쟁으로 역대 전쟁 역사에서 특별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절대적인 약자가 어떻게 싸워야 절대적인 강자에게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었다. 미국은 북베트남을 상대로, 군사력, 정책적, 지리적 요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신생국이라는 이유로 방심한 태도를 보였다. 더불어, 베트남 전쟁이 단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사상 및 이념의 차이로 발생했을 것이라고 성급한 일반화를 한 결과,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견해로는 단지 북과 남의 대립이 전쟁 구도를 형성한 것이 아닌, 남베트남 정권의 독재와 이로 인한 국민들의 배신감이 북베트남과 베트콩들을 옹호하고 지지하게 한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베트남 전쟁을 통해 우리는 배움의 자세를 지녀야 할 것 같다. 또한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왜 승리하지 못했는가에 교훈을 되돌아봐야 한다. 무슨 목적으로 전쟁을 하고, 무엇을 우선 사항으로 두어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하고, 다시는 과거와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발생 원인을 단지 각 측의 사상 및 이념의 이질감, 역사적 배경의 차이로만 일반화하지 않고, 양측의 상관관계, 이해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비로소 전쟁이 발생하는 이유를 명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미국과 같은 수치를 겪지 않기 위해, 상대가 설령 약한 국가나 세력일지라도 방심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즈덤 글로벌] : 베트남은 한국과의 수교를 30년 넘게 지속하고 있으며, 대략 18만 명의 재외동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한국과의 관계가 깊은 베트남에 대한 크고 작은 이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칼럼을 연재합니다. 위즈덤 아고라 김여진 기자의 ‘위즈덤 글로벌’로 미시적, 거시적 관점에서 베트남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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