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전시되는 독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 유행 그 이후에도 남는 ‘진짜 독서’는 무엇일까?
[객원 에디터 9기 / 정한나 기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감상을 나눈다. 영상과 이미지 중심의 시대에 ‘텍스트’가 다시 중심에 섰다. 요즘 10대와 20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책을 읽고, 독서 감상을 공유하며, 자발적으로 글을 쓴다. 한때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게 여겨졌던 텍스트 문화가 지금은 ‘힙하다’고 불린다. SNS를 중심으로 확산 중인 ‘텍스트힙’’ 열풍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독서뿐 아니라 필사와 글쓰기, 독서 모임 참여 등 텍스트를 둘러싼 활동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텍스트힙’은 글을 뜻하는 ‘텍스트’’와 멋지다·세련됐다는 뜻의 ‘힙’을 합친 신조어이다. 책을 읽고 필사하며,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을 트렌디한 행위로 인식하는 젊은 세대의 문화를 포괄하는 말이다. 202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해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관심이 급증했다. 특히 SNS에서는 독서와 관련된 해시태그와 신조어가 유행하며, 텍스트힙은 Z세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추천하고 싶은 책이나 작가를 짧은 영상이나 이미지와 함께 소개하고, 책 속 문장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게시글로 남긴다. 이러한 문화는 해시태그 확산을 통해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독서와 관련된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2024년 기준 620만 개를 넘어섰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환경에서 자란 세대가 다시 아날로그적인 텍스트에 주목하고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는 1020세대는 독서를 오히려 ‘새롭고 개성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SNS에 책을 읽는 사진이나 글귀를 공유하며, 지적 이미지를 연출하고, 동시에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복고풍 감성이 떠오른 최근 문화 흐름과도 연결된다. 책 읽는 자신을 사진으로 남기고, 필사 노트를 공유하며, 독후감을 콘텐츠화하는 과정을 ‘자기 브랜딩’의 일환으로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독서는 개인의 취미이자 사회적 행위로 진화했다.
텍스트 문화의 확산은 플랫폼의 성장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 ‘밀리의 서재’는 2023년 말 누적 가입자가 710만 명이었으나, 2024년 말에는 856만 명으로 증가했다. 독서 플랫폼이나 온오프라인 독서 모임의 참여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 SNS 외에도 글쓰기 플랫폼의 이용자 수도 증가했다. 네이버 블로그와 카카오 브런치스토리는 일상, 감정, 취향 등을 기록하는 ‘디지털 일기장’ 역할을 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네이버 블로그의 10대 및 20대 월간 활성 이용자 수는 2021년 3월 기준 각각 26만 명, 64만 명이었지만, 2024년 8월에는 각각 60만 명, 103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독서를 넘어 ‘직접 글을 쓰는 사람’도 많아졌다. 특히 필사는 단순한 공부 방법을 넘어 하나의 취미로 자리 잡았다. 시, 문학, 철학, 자기 계발서, 법률서적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필사를 위한 전용 도서가 출간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2023년에는 필사책이 57종이었으나, 2024년에는 81종으로 24종이나 증가했다. 이 같은 변화는 사람들이 ‘글쓰기’를 통한 사유와 감정 정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Z세대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들의 영향이다. 아이돌 에스파의 카리나가 추천한 정세랑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은 예스 24 판매량이 전월 대비 157% 증가했다. 아이브 장원영이 언급한 『초역 부처의 말』, 배우 한소희가 추천한 『불안의 서』 역시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품절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흐름에 독서 플랫폼들도 주목했다. ‘밀리의 서재’는 배우 김태리가 낭독한 콘텐츠를 선보였고, 예스 24는 아이돌과 배우들이 자신의 ‘인생책 리스트’를 공개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팬들이 인플루언서를 따라 책을 구매하는 ‘책소비 연쇄 효과’는 출판 업계에도 활기를 불어넣었다.
전문가들은 텍스트힙 현상에 대해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짚는다. 김민정 교수는 “디지털 네이티브의 호기심과 SNS 인프라가 만나 생긴 흐름”이라며, 과시적 소비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적 동기와 자발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선 장르 측면에서, 현재는 시나 실용서 위주의 콘텐츠가 많지만, 향후에는 순수 과학이나 인문학 분야로도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숏폼 영상이나 요약 콘텐츠로는 채워지지 않는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른바 ‘벽돌책’이라 불리는 두꺼운 전문 서적이 다시 주목받을 수 있다는 예측도 있다. Z세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문화가 중장년층에게도 자극이 되어 전 세대대적인 독서 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적지 않다.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유행은 일시적이며, 현재의 텍스트힙 열풍이 곧 사그라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지금의 현상은 텍스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그것을 매개로 한 관계 맺기에 더 무게가 있다”라고 지적한다. 러닝크루, 마라톤 모임처럼 활동 자체보다 소속감을 중시하는 흐름의 연장선이라는 분석이다.
독서 열풍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세대는 언제든 새로운 매개체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텍스트힙 현상이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새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재근 평론가는 “분명 허세와 과시적 요소도 있지만, 문화예술이란 본래 일정 부분 허영을 동반하는 것”이라며, “지금 중요한 건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 열풍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텍스트힙’에서 ‘독서 문화’로의 전환을 위한 사회적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