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은 아직 유효하다
by Seoyun Lee (2006)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오랜 희생과 노력을 해왔다. 민주주의란 공화정으로 한 국가의 주권을 소수가 아닌 모든 국민에게 부여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국민들이 당시 절대왕정을 끌어내려 ‘프랑스 대혁명’으로 공화정을 실시했고, 1986년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피플파워 혁명’이 일어났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1987년에는 전두환 정권의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2016년에도 비선 실세 비리에 분노한 국민들이 촛불집회를 여는 등 정권을 교체시켰다. 그리고 지금도 국민들은 현 정부에 대한 날 선 비판과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정희 유신 헌법 시절을 거쳐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까지 독재정권 아래서 자유가 억압된 삶을 살았다. 국민들은 당시 정부의 거짓에 속아 살았고, 군부의 압박과 탄압이 두려워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지내야 했다. 박정희는 대통령 직위를 유지하고 싶어서 유신헌법을 만들어 입법권과 사법권을 장악하며 제왕적인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 연임 제한까지 폐기시켰다. 이후 김재규 총에 박정희는 암살되었지만 군인 출신 전두환은 12·12 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다시 장악하기에 이른다. 7년 단임제와 대통령 간선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 후 출범한 5 공화국에서는 대통령을 소수의 사람들이 선출했고, 전두환은 체육관에서 99%의 득표율로 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인 1980년 계속된 군부독재에 분노한 국민들이 시위를 했지만. 전두환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과 시민 모두를 무자비하게 총과 칼로 제압하며 5.18 민주화 운동은 많은 희생자를 낳게 되었다.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아무리 군부독재라도 막을 수 없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았던 1987년 6월, 거리마다 시민들이 나와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6월 항쟁은 박종철 군 고문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박종철 군은 경찰에 의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물고문을 받은 뒤 질식사로 사망하였다. 어이없게도 당시 경찰은 사망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박종철 군의 아버지와 형에게는 책상을 ‘탁’하고 쳤더니 깜짝 놀라며 ‘억’하고 죽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진실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중앙일보가 제일 처음으로 이 사건에 대해 보도했다. 경찰들은 고문 사실을 인정하였지만, 진실을 조작하였다. 다행히도 당시 영등포 교도소 보안계장 안유가 조작 사실을 당시 투옥 중이던 이부영 기자에게 알리며 박종철 군의 사망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당시 범인을 둘러싼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고문을 했다고 잡혀간 경찰관들은 체포 당시부터 신변보호를 받고 있었고, 감옥에 있을 동안 고위 간부들이 자주 찾아와 각자 1억을 주겠다고 한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안유를 통해 이 사실을 들은 이부영은 고위 간부들이 사망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교도소 밖으로 편지를 보냈고, 이 임무는 당시 교도관이었던 한재동에 의해 김정남에게 전달이 되었다. 그리고 김정남은 성명서를 써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게 전했다. 김승훈 신부는 약 2000명이 참석한 5·18 추모기념행사에서 이 성명서를 읽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전두환 정부의 악랄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국민들의 많은 노력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성명서 발표에 앞서 전두환은 현 헌법을 지켜 대통령 직선제를 막겠다며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국민들을 더욱더 분노하게 하였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규탄대회’ 집회에 참여한 경영학과 2학년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박종철군의 죽음이 명백한 조작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학교 안까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내로 도망쳤지만 이한열 군은 맨 앞에서 당당히 시위를 하였고, 최루탄의 조준사격으로 머리를 심하게 다친 후, 약 한 달 뒤 사망하였다.
국민들을 더욱 끓게 만든 일은, 다음날 잠실운동장에서 민정당이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한 것이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시위를 다시 시작하지만, 백골단의 거센 진압으로 인하여 명동성당 앞에서 해산하려던 시위대가 성당 안에 5박 6일 동안 갇히게 되었다. 이를 명동성당 농성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뒤로 경찰이 아무리 상황을 진압하려 해도 시위하는 시민들은 계속 늘어나, 5일 뒤 성당 안에 있던 시위대가 안전하게 해산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부산을 시작해 광주 등 전국적으로 시위가 퍼졌고, 소위 ‘넥타이 부대’ (즉 회사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당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6월 29일, 직선제 선언을 하며 항복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드디어 국가의 최고 권력인 대통령을 스스로 선출하게 되었다. 마지막에 국민의 승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 각각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시위도 많이 나갔을 것이고, 육체적인 고생도 감수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온 국민이 하나 되어,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한 믿음과 한 몸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한 명의 권력자에 맞서 우리의 자유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희생을 통해 지켜내는 데 성공하여, 승리하게 되었다. 이후,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이 발생하였고, 촛불집회를 통해 국민이 하나 되어 대통령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1987년, 그리고 2016년 두 번의 민주화 운동에서 국민들의 희생과 용기를 통하여 우리는 승리를 하게 되었지만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려면 우리 모두 정치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탐욕이 들끓고 독재는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더 집중하며 민주주의를 한 걸음씩 발전시켜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은 모두 국민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