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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 전태일 열사의 희생과 노동자의 삶

Illustration by Sihyun Jeun (NAS Dubai Year 10)

by Hyejin Kang (DAA Grade 6)

전태일 열사가 분신을 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있지 않은 영세 기업들이 많다.  아직도 노동자들은 억울한 피해를 당하고 있고 최근 특수고용직인 플랫폼 노동자가 많아지면서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미용실에서 일하는 A씨는 하루 10시간씩, 주당 6일 일하는데, 월급으로 100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을 받았다고 했다. 이는 애초 구인 사이트에서 본 220만 원은 고사하고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않았다. 노무사·변호사 등 노동전문가들이 설립한 단체 ‘직장 갑질 119’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 퍼블릭’에 의뢰해 4일간 전국 만 19∼55세 직장인 1천 명을 대상으로 근로기준법 등 인식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하였다. 그 결과 40%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있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1961년,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들어서게 된다. 평화시장은 한국전쟁 당시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미군복을 다시 제조해서 판매하거나, 미싱으로 옷을 짓는 곳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청계천변에 노점상들이 몰려들면서 큰 상권이 형성되었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경공업을 육성하며 가난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특히, 평화시장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고, 섬유산업의 특성상 환경은 열악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큰 방에서 사람들이 빽빽이 앉아서 계속 미싱을 돌렸다. 환기를 시키지 않아서 공기는 먼지로 가득했고, 빛은 백열등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노동자들은 폐병에 걸리길 일수였고, 밖에 나가면 너무 눈부셔서 눈을 못 뜨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런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일을 관리자가 알게 되면 해고당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피해를 받은 노동자들은 대부분 제일 밑에 있는 ‘시다’였다. 시다들은 대부분 어린 여성 근로자로, 적은 임금과 14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며 집안과 국가 경제를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

전태일은 이런 어린 여성 근로자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의 막연한 현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큰 병에 걸릴 때까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해결 방안을 찾으러 다녔다. 그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근로기준법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 당시 근로기준법을 보면, “제1조,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며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42조,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에 8시간, 1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단,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하여 1주일에 60시간을 한도로 한다.” “제45조,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주어야 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전태일은 이렇게 법이 있는데도 왜 준수가 되지 않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며 열심히 근로기준법에 대해 공부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은, 바보회와 삼동회이다. 그는 바보회에서 3만여 명의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후, 근로 감독원에게 제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직장에서 해고될까 봐 근로자들은 설문조사를 하는 것을 꺼려 하여 겨우 30명 정도만 설문에 응했고, 전태일은 노동자들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그는 평화시장 관리자, 기자, 전두환 대통령에게까지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며 편지를 쓰고 인터뷰를 했지만 그의 외침은 묻혔다. 10월 24일, 삼동회 회원들은 준비한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도했지만 미리 알아챈 정보계 형사들과 경비원들로 인해 강제 해산 당했다. 11월 12일, 삼동회 회원들은 근로기준법 책 화형식을 하자고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전태일은 그날,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외침과 함께 그의 젊은 육신을 불살랐다. 

자신의 아들이 노동자들을 위해 몸을 불살랐다는 소식을 들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씨는, 그녀의 아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며 사람들을 이끌어 나갔다. 그녀는 노동운동을 하며 독재정부의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고, 1970년대 말 동일방직, YH무역 등 여성노동자들의 시위에 영향을 주었다. 1987년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에 이어, 노동자들의 외침이 나라에 울려 퍼졌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 시위가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노동조건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이후 해고, 비정규직, 하청구조가 생기면서 기업들도 위기를 맞이했고 실업률도 8%로 폭등했다. 당시 신자유주의 여파와 IMF가 요구한 기업 구조조정과 주식시장 개방 등으로 우리나라 기업들은 외국 자본에 잠식당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인권은 줄어들었다. 이러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던 기업들은 사람들을 해고하기 시작했고 대표적으로 2010년, 한진중공업은 생산직 1/3이 넘는 400명을 해고하였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계획을 철회하라는 외침의 언성을 높였고, 이 외침에는 세상에 자신들의 참혹한 현실을 알리려는 희생자들이 있었다.

2020년, 전태일 이후, 많은 노동자의 용기와 희생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이 많이 안정되고 나아진 상태이다. 하지만 아직도 억울한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이 나오고 있고, 제대로 된 형벌을 받은 기업은 적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20살 젊은 노동자가 문에 껴서 허망한 죽음을 맞았고, 2년 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석탄이송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김용균 씨가 사망했다. 또, 하루에 400개 정도의 물량을 소화하는 택배기사들은 평균 14~15시간을 일하고 있어 올해만 14명의 택배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면서도, 기업들은 노동자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고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사망을 방치한 기업은, 고작 400만 원의 벌금을 내면 그만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자들을 비하하는 발언이나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체적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기업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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