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위즈덤 아고라 / 박송아 오피니언 투고] 우리는 지금,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는 투표권을 그저 단순한 행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근에는 낮은 투표율이나 잦은 탄핵과 같은 정치적 혼란을 이유로, 투표의 실효성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바로 그 한 표가 쌓여 독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연 순간들이 있었다. 투표는 단지 종이에 도장을 찍는 행위가 아니라, 국민이 직접 권력을 선택하고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렇기에 투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것을 행사하는 우리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주인이자 자랑스러운 시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소중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피와 눈물이 있었다. 1948년, 제헌국회 선거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선거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곧바로 자유로운 나라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이 각각 점령한 ‘미소 군정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곧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졌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 다른 이념을 갖고 있었고, 결국 한반도에 단일한 정부를 세우는 데 합의하지 못했다. 유엔은 한반도 전체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권고했지만, 소련이 이를 거부하고 북쪽의 총선거를 막는 바람에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단독으로 총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이 참여한 민주적 선거였지만 반쪽선거였다. 하지만 국민의 투표로 7월 17일에는 제헌헌법이 제정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대 헌법은 민주공화제를 명시하며 국민 주권의 가치를 담았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오래가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점차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헌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개헌은 1952년, 대통령을 국회가 아닌 국민이 직접 뽑는 방식으로 바꾸는 ‘발췌개헌’이었다. 이는 자신에게 불리한 국회의 대통령 간선제를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두 번째 개헌은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이었다. 이승만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기 위해 개헌을 추진했고,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될 상황이 되자 ‘사사오입’, 즉 숫자를 억지로 끼워 맞춰 통과시켜 버렸다. 이러한 개헌은 국민의 뜻과는 점점 멀어졌고, 권력을 연장하려는 독재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남아 있었지만, 그 내용은 점점 퇴색해 갔던 시기였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은 네 번째 정권 유지를 위해 역사에 길이 남을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당시 이승만은 이미 80세가 넘은 고령이었고, 국민들의 지지도 약해지고 있었지만, 권력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자유당 정권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투표함을 바꿔치기하고, 야당 참관인을 끌어내고, 심지어 투표를 하지도 않은 유권자의 표가 집계되기도 했다. 이러한 노골적인 부정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특히 학생들과 시민들이 먼저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무렵, 더 큰 분노의 불씨가 터졌다.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된 중학생 김주열 군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채, 27일 만에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는 눈에 최루탄이 박여 있었고, 바다에 유기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학생을 죽인 정권은 물러나라”는 외침이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인 4월 19일에는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서울 시내와 전국 도시에서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지만, 사람들은 두려움보다 정의에 대한 갈망으로 더욱 거세게 외쳤다. 결국 4월 26일, 국민의 거센 저항을 이기지 못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야하게 된다. 국민의 값진 승리였지만 180여 명이 사망하고, 약 6천여 명이 부상을 당한 희생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말해주는 것은 단 하나다. 유권자의 권리는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민의 희생과 노력으로 쌓아올린 성취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투표권은, 누군가의 청춘과 생명을 담보로 지켜낸 결과다. 1960년의 4.19 혁명뿐 아니라, 1970~80년대 군사독재에 맞선 수많은 시위와 투쟁, 그리고 1987년의 6월 항쟁은 우리에게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아주었다. 하지만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사건이 생겼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며 ‘광장의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수많은 국민은 유권자로서의 책임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2024년 12월,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탄핵 정국을 맞이했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국회 기능을 제한하고 언론 자유까지 침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조치는 국민의 기본권을 명백히 침해한 위헌적 행위로 간주되었고, 전국적으로 거센 시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국회는 즉각적으로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민들의 불만이 더욱 커지자, 결국 국회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고,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 4일 그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로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탄핵시킨 사건이며, 다시 한번 투표권과 유권자의 권리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준 결과였다.
나는 아직 투표권이 없는 청소년이지만, 그렇다고 정치와 투표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중에 투표를 할 수 있을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지 지금부터 고민하고 준비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낀다. 투표는 단지 한 장의 종이에 도장을 찍는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회와 가치를 선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한 표를 소중하게 써야 한다고 믿는다. 또, 투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투표한 이후에도 정치가 잘 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게 중요하다. 정치가 나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친구들과도 정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선거는 후보가 내세우는 정책과 국가에 대한 철학, 그리고 시민의 삶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지도자가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하며,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곧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만든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했으면 한다. 내가 어른이 되어 유권자가 되면,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한 표를 소중하게 행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을 위해 지금부터 사회에 관심을 갖고, 더 많이 배우고,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는 잘 찍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자신 있게 “네!”라고 말할 수 있는 유권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