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투쟁, 부마민주항쟁
아픈 역사를 가진 부산과 마산
[객원 에디터 6기 / 정서영 기자 ] 부마민주항쟁은 1976년 10월 16일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일어난 시위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부마민주 항쟁은 1976년 10월 16일 아침 10시경, 부산 대학교의 도서관 앞에 시위를 하러 모인 500명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애국가와 통일의 노래 등을 부르며 “유신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고 부산대학교 학생들만 약 5000명, 비슷한 시간에 동아대학교에서도 약 1000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다음날인 17일부터는 일반 시민들도 시위에 합류하여 더 큰 규모의 시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편, 마산에서는 18일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다. 약 1000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모여 마산시내의 번화가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일부 시민들도 동참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밖이 어두워지자 시위는 더욱 격화되어 사람들은 파출소와 공화당사 등의 건물의 유리창에 돌을 던져 부수고, 파출소로 뛰어 들어가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포스터를 뜯기도 했다. 19일에는 시위가 더 거세져서 잠시 정부가 없어 국가의 사회질서가 잘 유지되지 않는 무정부 사태가 벌어지는 등 치열한 신경전이 오갔다.
시위는 1976년 10월 26일 오전 12시에 부산지역의 계엄군을 철수하고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이 연회 중 총살당하면서 끝이 나게 되었다.
부마민주항쟁 이후 2014년 10월 13일 부마항쟁 진상규명·보상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으며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부산민주공원이 부산광역시에 조성되고, 창원시에 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설치되는 등 부마민주항쟁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이 시위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이 시위를 통해 통계자료 기준 1058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125명의 구금자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상자를 만든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의 붕괴를 앞당긴 사건으로 , 긴급조치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유신체제를 위기로 몰아넣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런 사건들과 당시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