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성유전학의 신비, 유전자 꼬리표
[객원 에디터 3기 / 문시연 기자] 현대 생물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야인 후성유전학은 생물학, 약학, 유전학 등 다양한 분야와 관련이 있다. 생물학의 많은 신비를 풀 것으로 기대되는 후성유전학은 과연 무엇일까? 후성유전학을 이해하려면 우선 유전학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유전학(genetics)은 생물의 유전과 유전자 다양성 등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최초로 유전을 연구한 사람은 19세기 중반에 유전 법칙을 발견한 그레고어 멘델이다. 여기서 그가 유전 대립쌍이라고 표현했던 물질은 오늘날에는 ‘유전자’라고 불린다. 유전자는 현대 유전학의 핵심 개념인데, 전체 게놈 서열 가운데 DNA의 일정 구간을 이루는 염기 서열의 배열을 말한다.
생물의 발생과 성장, 진화 과정 속 유전자의 역할, DNA 재조합 실험을 통한 유전체와 생물 정보 탐구 등이 현대 유전학의 주요 영역이다. 현대 유전학은 주로 유전체학, 집단유전학, 진화유전학 등으로 세분되어 있고, 의학, 식품,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재 응용되고 있다. 특히 유전공학 연구원들은 유전자 조작 약품 개발과 품종개량 등에 노력을 기울이며 우리 실생활에 유의미하게 기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볼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나타나는 유전자 기능의 변화가 유전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쉽게 풀어서 얘기하면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DNA 염기나 히스톤 단백질에 분자 표지를 남겨 유전자 발현을 조절해 나가는 생명현상을 다룬다. 이러한 분자 표지가 세포분열 후에도 남아 있고 세대를 통해 유전될 수 있음을 후생 유전학은 증명하고 있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의 ‘epi-’라는 접두사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고, ‘~의 위에’, ‘덧붙여’라는 의미가 있다. 문자 그대로 후성유전학은 전통적인 유전학 너머의 유전 현상들을 탐구하는 학문이며 DNA 염기서열, DNA와 염색질의 구조적 변형 등을 다룬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세포나 개체들이 유전자의 발현을 달리하여 표현형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후성유전학적 현상이라고 한다. 주로 바이러스나 전이인자를 억제하는 작용으로 작용하지만, 개체의 발달 과정상 다양한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것을 후성유전학적 조절이라고 한다.
2015년에 미국의 NASA는 ‘우주 공간에서의 생체 변화’를 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여기서 NASA 우주 비행사이면서 일란성쌍둥이인 마크 켈리와 스콧 켈리를 지구와 국제 우주정거장에서 각각 일 년을 살게 하고 신체의 변화를 추적했다. 스콧 켈리는 2016년 3월 약 일 년 만에 우주에서 지구로 귀환했다.
과학자들은 쌍둥이의 신체 변화 중 유전자 변화를 제일 먼저 확인했지만, 예상외로 그들의 유전자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주와 지구에서 각각 살았던 쌍둥이 형제의 유전자 발현에서 차이가 있었다. 즉 그들의 유전자는 여전히 같았지만 유전자 발현 강도가 달랐다.
일반적으로 유전자 발현은 DNA에서 RNA가, 그리고 RNA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뜻하는데 위 실험의 경우 DNA에서 RNA가 만들어지는 정도가 자체가 달랐다. 어떤 RNA는 우주에서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만들어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그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많거나 적게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보통 이것은 DNA 돌연변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 없이도 유전자 발현이 조절될 수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유전자 발현을 규명하는 것이 후성유전학 이른바 유전자 꼬리표인데 메틸기가 이러한 유전자 꼬리표 역할을 한다. 유전자 꼬리표가 붙고 떨어지는 것은 생명체의 주위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주와 같은 특수 환경에서 무엇을 먹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가 유전자 꼬리표 조절에 영향을 미친다. 한 번 붙은 유전자 꼬리표는 후세에도 그대로 전달되는데, 전통적인 유전과 구분해 이를 후성유전(epigenetic)이라 하고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후성유전학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유전자 꼬리표의 예시로 여왕벌과 일벌을 들 수 있다. 모든 암컷 벌의 유전자는 똑같은데 암컷 유충이 로열젤리를 먹으면 여왕벌이, 그냥 꿀만 먹으면 일벌이 된다.
비만에 걸린 쥐의 새끼가 어미 쥐처럼 비만이 되고, 그 새끼 쥐가 나중에 새끼를 낳았더니 그 역시 비만이 되는 것도 적절한 예시이다. 비만 쥐의 비만 정보가 생식세포 유전자에 꼬리표로 남아 후손에게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일란성쌍둥이는 유전자가 정말 똑같지만 서로 다른 병이 생기기도 하고 건강 상태도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세포는 같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데 어떤 세포는 뇌세포가 어떤 세포는 손이나 발의 근육 세포가 되는 등 차이가 생긴다. 이러한 현상의 주요인 중 하나가 유전자 꼬리표이며 이는 다양한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유전자 돌연변이가 주로 암을 유발한다고 알려졌는데 유전자 꼬리표도 대다수 암의 주요 원인임이 밝혀지고 있다. 최근에 많은 과학자가 대장암, 간암, 위암 등에서 후성유전적 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유전자 꼬리표가 암 발병에 미치는 기작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떼거나 붙이는 방식의 새로운 항암제 개발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처럼 후성유전학은 현대 생물학에서 그 위상과 중요도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전통적인 유전학은 물론 후성유전학에 대한 깊은 탐구가 이루어질 때 인류는 생명현상에 대한 통찰을 얻어 더 많은 질병을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