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은둔형 외톨이를 닮은 19세기 ‘필경사 바틀비’

<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위즈덤 아고라 / 박송아 오피니언 투고]“필경사 바틀비”는 1853년 허먼 멜빌이 쓴 단편 소설이다. 19세기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 인간성의 관계를 조명하는 작품으로, 주인공 바틀비는 변호사의 필경사로 고용되지만, 점차 업무를 거부하며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반복한다. 그는 단순한 게으름뱅이나 반항아가 아니라, 당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기계처럼 취급되는 현실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바틀비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을까? 이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노동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하나의 철학적 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이 배경으로 삼은 19세기 미국은 관료제와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로,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기계처럼 취급되었다. 변호사와 다른 필경사들은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며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바틀비는 이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사회 구조에 균열을 낸다. 바틀비가 변호사 사무실에 오기 전에 맡았던 ‘수취불능 상태의 우편물’ 처리는 그가 세상과 단절된 존재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렸고, 이는 단순한 직무 태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바틀비의 거부는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다. 그는 명령을 거부하지만 강하게 반항하지 않고, 해고당해도 사무실을 떠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태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자신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거부하는 하나의 철학적 태도로 볼 수 있다. 보통 사회의 불합리한 문제나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저항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면, 1970년 평화시장에서 노동자들의 부당한 처우에 맞서 싸운 전태일 열사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전태일 열사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항거하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그는 직접적인 행동과 극단적인 희생을 통해 노동 문제를 공론화하고 사회 변화를 촉진했다. 그의 저항은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바틀비의 소극적 저항 방식에 대응되는 사례라 볼 수 있다. 바틀비는 이런 적극적 저항 대신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변호사가 시키는 일이나 요구에 대해 거절을 하는데, 이는  단순한 거부의 의미를 넘어, ‘일을 하지 않겠다’는 주체적인 선택임을 강조한다. 이 말은 기존 질서 속에서 인간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고, 바틀비가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을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아무런 설명 없이 단순히 거부하기만 하지만, 그 태도는 점점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변호사 역시 바틀비의 존재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조용한 저항일지라도 단순한 개인적인 선택을 넘어, 사회적 질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변호사는 처음에 바틀비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리로 내몬다. 그는 인간적인 동정심을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바틀비를 포용하지 못하고 사회의 틀 안에서 해결하려 한다. 변호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거부하는 바틀비를 끝내 감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과연 변호사는 그를 돕지 못한 선량한 고용주였을까? 변호사의 가장 큰 문제는 바틀비를 무기력하게 만든 장본임에도 끝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채용하면서 그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그의 자리 또한 사무실 한구석에 있는 창문도 제대로 없는 좁은 공간으로 일방적으로 배치했다. 바틀비는 사회에서 자신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역할 자체를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처음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변호사는 당황하면서도 그를 강하게 다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직원이 자신의 명령을 거절할 거라고는 1%도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가 당연한 것이라 믿었고, 명령이 거부될 가능성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바틀비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처음에는 가벼운 호기심과 동정심으로 그를 대했다. 그러나 바틀비가 사무실의 업무를 점점 더 거부하기 시작하자, 변호사는 그의 존재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설득하던 변호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바틀비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바틀비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사실상 이는 바틀비가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노동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는 바틀비에게 친절하게 조언하는 척하면서도, 점차 감정을 배제한 협박조로 다른 일을 하라고 강요했다. “이 일을 못 하겠다면,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좋겠어.”라고 말하며, 바틀비를 궁지로 몰았다. 그러나 바틀비는 끝까지 저항했고, 변호사는 결국 바틀비를 내쫓기보다 자신이 사무실을 떠나는 방법을 택했다. 변호사는 바틀비가 무기력해지는 근본적인 원인이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바틀비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변호사가 시키는 일을 거부하기 이전부터, 바틀비는 이미 노동자가 아닌 하나의 ‘물건’처럼 취급받고 있었다. 변호사는 바틀비가 이전에 ‘수취불능 상태의 우편물’ 처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이를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바틀비는 한때 ‘죽음’과 관련된 우편물들을 반복적으로 다루며 극도로 소외된 노동을 수행했다. 그는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일해야 하는 환경에서 점점 삶의 의지를 잃어갔고, 변호사의 사무실에 온 후에도 그런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변호사는 바틀비의 과거를 이해하기보다 단순히 다른 직업을 제안하며 현실적인 해결책만을 찾으려 한다. 그는 바틀비에게 “우체국 직원은 어떤가?” “문서 배달원은 괜찮지 않겠나?”라고 말하며, 바틀비가 기존 노동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단순히 일자리를 바꾸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일방적인 해결책은 바틀비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들 뿐이었다.

결국 바틀비가 교도소에 갇히게 되었을 때도, 변호사는 그를 진정으로 도우려 하기보다 단순한 동정심에서 약간의 도움을 제공할 뿐이었다. 교도소에서 바틀비가 음식을 거부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그가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변호사는 끝까지 바틀비의 거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를 병들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변호사의 가장 큰 문제는 바틀비와 일방적인 소통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바틀비에게 지속적으로 해결책을 강요하지만, 정작 바틀비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진심으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바틀비의 태도는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과 인간의 역할에 대한 거부였지만, 변호사는 이를 하나의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본다. 바틀비가 끝까지 자신의 선택을 유지한 것과 달리, 변호사는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외면하며 그저 사회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처럼, 변호사는 선량한 고용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바틀비를 무기력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며, 결국 바틀비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심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도 이렇게 바틀비처럼 조용히 현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다. 히키코모리는 사회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직장도 가지 않으며, 밖에 나가는 일조차 최소한으로 줄인다. 마치 바틀비가 사무실 한구석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히키코모리도 현실을 거부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선택하고 있는 추세다.

바틀비와 히키코모리의 공통점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커서는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모두가 그 길을 쉽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는 학창 시절 따돌림을 당했거나, 대학 입시에서 실패했거나, 취업에서 반복적으로 좌절을 겪은 이들이 많다. 그들은 점점 세상과 단절하고, 결국 자신만의 작은 세계에 갇히게 된다. 그 결과로 히키코모리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자포자기 상태로 은둔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수의 은둔형 외톨이는 단순히 “귀찮아서” 현실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바틀비가 변호사의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리며 끝까지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듯, 히키코모리들도 적극적으로 사회에 저항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순응하지도 않는다. 왜 누군가는 바깥세상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공간에 갇혀버리는 걸까? 우리는 그들에게 “왜 그냥 나가서 일 안 해?”라고 묻기 전에,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결국, 바틀비도, 히키코모리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안 하는 편을 택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그들을 불편하게 여긴다. 현대 사회도 히키코모리를 “문제”로만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바틀비는 단순히 일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강한 저항이 아니라 조용한 거부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이해하려 했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못했고, 바틀비는 스스로 세상과 단절된 길을 선택했다. 바틀비의 태도는 현대사회에서도 노동과 인간성의 관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할’ 수 있는가?

현대 사회에서 바틀비와 같은 존재를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노동과 성공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지금의 획일적인 성공 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 사회는 학교 성적, 대학 입학, 좋은 직장 같은 일정한 틀 안에서 ‘성공’을 정의하지만, 만약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하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기존의 노동 방식을 강요받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단순한 성공과 실패로 정의되는 세상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가 조성된다면, 현대 사회에서도 바틀비 같은 존재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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