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수능, 과거 시험
조선 시대 관리가 되기 위한 첫걸음, 과거 시험
[객원 에디터 3기 / 유수임 기자]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꾸준히 시험을 치른다. 조선 시대에도 남자들은 서당과 성균관에 다녔고, 관리가 되기 위해 우리나라의 수능과 비슷한 과거 시험을 보았다. 과거 시험은 3년에 한 번 열리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중간중간에 임시 시험도 있었다.
과거 시험은 문신을 뽑는 문과가 중심이 되었지만, 무신을 뽑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 그리고 승려들이 치르는 승과도 있었다. 시험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소과와 대과가 있었다. 소과는 합격하면 시험 종류에 따라서 생원이나 진사라고 불리게 되었고, 조선 시대 최고의 학교, 지금으로 치면 대학교인 성균관에 입학할 수도 있었다. 과거 시험이 생각보다 많이 어려워서 성균관에는 정말 똑똑한 사람들만 모였고, 물론 다른 유생들과 함께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왕세자도 성균관에 입학해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임을 나타내었다. 성균관은 종묘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 종묘 옆에 지어졌던 까닭은 엄격한 유교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학자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공부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균관에 다니는 학생들도 시험을 꾸준히 보았는데, 매일 보는 시험은 일고, 열흘마다 보는 시험은 순고, 매월 보는 시험은 원고, 매년 보는 시험은 연고라고 불렀다. 시험의 내용은 유교와 관련된 책 내용이었고, 책 내용 전체를 외우고 그 내용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소과 합격자나 성균관 학생들에게는 과거 시험의 두 번째 단계인 대과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대과는 3단계로 나뉘었는데, 각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 초시 합격생들을 한양에 모아 치르는 복시, 임금 앞에서 치르는 어전시가 있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일단 무조건 관직을 얻었지만, 점수에 따라 이후 관직 승직이 결정되었다. 장원 급제자는 복사꽃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임금이 내리는 술을 받았고, 약 3일 동안 고향에서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과거시험의 경쟁률은 어마어마했다. 총 33명을 뽑는 과거 시험의 응시자는 평균 6만 3천 명으로 약 2천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대과(문과)에서는 성적순으로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등 모두 33명을 뽑았고, 합격을 위해 보통 5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30~35세쯤 되어야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첫 번째 시험인 초시에서 200명을 뽑고, 그중에서 복시를 치러 최종 합격자 33명을 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