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즈덤 네이처]전쟁이 만든 약

평화를 위한 과학

< Illustration by Nicole ara baik lee 2012(이아라)>

[위즈덤 아고라 / 김채희 기자] 총알보다 더 무서운 적은 종종 눈에 보이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병사들이 독가스에 노출돼 폐 손상과 피부 화상으로 고통받았고, 상당수는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선에서는 총탄보다 말라리아가 더 많은 병사를 쓰러뜨렸다. 실제 미군 기록에 따르면 전쟁 중 태평양 지역에서 약 50만 명 이상이 말라리아에 감염됐다. 전쟁은 늘 새로운 죽음의 얼굴을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에서 죽음을 막아주는 약도 함께 태어났다.

이런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오히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의학의 발전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전쟁 속에서 어떤 약들이 탄생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들이 뒤따랐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머스터드가스를 들 수 있다. 정식 명칭은 ‘메틸렌디클로로에틸설파이드(mustine, nitrogen mustard)’로 전쟁 중 수많은 병사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독성 물질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이 끔찍한 가스는 실험실에서 뜻밖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가스에 노출된 이들의 백혈구 수가 급격히 감소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과학자들은 그 파괴적인 힘을 암세포 치료에 응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기에서 치료제로 탈바꿈한 물질이 최초의 항암 화학요법제, “질소 머스터드”였다. 인간을 해치던 독이 생명을 구하는 약으로 변모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베트남 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병사들을 쓰러뜨린 것은 총상이 아니라 모기였다. 당시 태평양과 동남아 전선에서는 수십만 명이 말라리아에 걸렸고, 전투보다 병으로 전투력이 더 크게 무너졌다. 중국 정부는 이 위기를 막기 위해 1967년 ‘523 프로젝트’라는 비밀 연구를 시작했다. 수많은 실험 끝에 전통 약초인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기생충을 죽이는 성분을 찾아냈는데, 그게 바로 ‘아르테미신’이다. 이 약은 이후 전 세계 말라리아 환자의 치료에 쓰이며 지금까지도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려냈다.

이 약은 이후 전 세계 말라리아 환자들의 치료에 사용되며 지금까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 특히 이 발견을 이끈 과학자 투유유(Tu Youyou)가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군사적 필요에서 시작된 비밀 연구가 인류를 위한 의학적 성취로 이어졌고, 그 공로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어쩌면 전쟁의 절박함이 아니었다면, 그 약은 그렇게 빨리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남긴 약의 역사가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병사들에게 피로를 잊게 한다는 명목으로 메탐페타민을 대량 지급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병사들은 중독에 시달렸고,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서서히 무너져갔다. 미국 역시 전쟁 중 각성제를 보급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 그 약물들은 사회 문제로 되돌아왔다. ‘연구’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진행된 인체 실험 또한 오늘날 과학 윤리가 왜 필요한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런 어두운 과거를 계기로 현대 의학은 연구의 기본 규칙을 다시 세웠다. 지금은 임상시험을 하기 전 반드시 참여자의 자발적 동의서를 받아야 하고, 연구의 타당성과 안전성을 심사하는 윤리심의위원회(IRB)의 승인 없이는 어떤 실험도 진행할 수 없다. 또한 연구자는 실험 중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하면 즉시 보고하고, 참가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한다. 전쟁이 남긴 상처가 결국 연구 윤리와 법적 제도를 세우는 계기가 된 셈이다.

전쟁만이 약을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냉전기 군비 경쟁 역시 신약 개발의 불씨를 지폈다. 핵무기 실험과 방사능 노출 위험이 커지면서, 각국은 방사능 피폭을 막거나 치료하기 위한 연구에 막대한 자원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개발된 방사능 해독제와 세포 손상 억제 연구는 군사 목적에 머물지 않았다. 일부는 암세포를 공격하거나 보호하는 원리와 맞닿아 항암제 발전으로 이어졌다. 냉전 시대의 과학 연구도 약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 핵무기 실험이 한창이던 당시, 과학자들은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약을 찾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약 중 하나가 바로 원래는 군인들을 방사능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연구되었지만, 나중에는 암 치료에 쓰이는 항암 보호제로 발전했다. 지금은 항암제 ‘시스플라틴’을 맞는 환자에게 함께 투여되어 신장 손상이나 구강 건조 같은 부작용을 줄이는 데 사용된다. 냉전은 총성이 울리지 않은 전쟁이었지만, 의학에는 또 다른 압박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했던 셈이다. 

한편, 전쟁과 냉전 속에서 탄생한 약은 언제나 윤리적 논쟁을 동반한다. 동의 없는 인체실험, 군사적 필요가 앞선 약물 남용은 인류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다수의 응답자는 “전쟁이 의학 발전에 기여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윤리적 기준이 무너진 연구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과학이 진보할수록 사회는 연구의 성과만큼이나 연구의 과정과 책임을 묻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듯 전쟁이 만든 약은 인류에게 이중의 얼굴을 보여준다. 한쪽은 생명을 살리고 다른 쪽은 상처를 남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역설을 기억해야 한다. 약은 전쟁터의 부산물로 태어날 수 있지만, 그 진정한 가치는 평화 속에서 빛날 때 드러난다. 과학의 진보가 총성에 밀려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삶을 지키려는 집요한 노력에서 비롯되길 바라는 이유다. 앞으로 약물 연구는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뿐만 아니라, 팬데믹, 희귀 질환, 자연재해 등 다양한 위기 상황에서도 안전성과 윤리성을 바탕으로 인류 건강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위즈덤 네이처]약이라고 하면 보통 하얀 알약이나 병원에서 받는 처방전을 떠올리지만, 사실 약의 세계는 훨씬 더 크고 신기합니다. 악어 똥이 피임제로 쓰였던 고대 이집트부터, 나무껍질에서 아스피린이 태어난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 AI가 새로운 신약을 찾는 시대까지, 약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바꿔왔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때로는 치료제, 때로는 독, 또 어떤 때는 미신이기도 했던 ‘약’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파헤쳐 보려 합니다. 위즈덤 아고라 김채희 기자의 ‘위즈덤 네이처’에서, 낯설지만 재미있는 약의 세계로 함께 떠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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