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게서 배운 자가치유
<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위즈덤 아고라 / 김채희 기자]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가장 먼저 터득해야 했던 것은 먹을 것과 잠잘 곳뿐만이 아니었다. 상처와 병을 이겨내는 방법 역시 생존에 반드시 필요했다. 작은 상처가 곪아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고, 전염병이 돌면 공동체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에서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복용하는 알약이나 주사기는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발명품이다. 초기 인류가 병을 처음 치료하려 했을 때 손에 쥔 것은 풀잎과 나무껍질, 꿀, 그리고 술과 같은 자연의 산물이었다. 꿀은 상처에 바르면 세균 감역을 막는 데 쓰였고, 술은 상처 부위 소독에 활용됐다. 나무껍질에서는 통증 완화 성분이 추출돼 진통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에버스 파피루스’(Ebers Papyrus)라는 의학 문서에는 700가지가 넘는 처방이 기록돼 있다. 기생충 치료제, 피부 연고 심지어 피임법까지 포함돼 인류가 이미 3,500년 전부터 질병과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약을 사용해 왔음을 보여준다. 기록에 따르면 석류 껍질을 달여 기생충을 치료하고, 꿀과 동물성 지방을 섞어 피부병을 치료했으며, 악어 똥과 꿀을 섞어 피임제로 사용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는 대추 야자와 소금, 맥주를 혼합해 만든 약이 치료제로 활용했다는 흔적이 점토판에 기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혼합물은 소화 장애를 완화하거나 감염 증상을 줄이는 데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서도 인삼, 감초, 생강뿐만 아니라 다양한 약초가 등장해 각 약재의 성질과 효능, 사용 방법까지 상세히 기록돼 있어 고대부터 체계적인 전통 의학 지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대의 처방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귀족 사회에서는 납이 섞인 단맛 나는 시럽을 포도주 보존제와 감미료로 사용해 만성 납 중독으로 불임과 신경계 질환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고대 중국과 인도, 그리스에서는 수은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해 장기 복용 시 신경계 손상과 조기 사망을 초래했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수은을 먹다 사망했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고대의 의학은 성공과 실패가 뒤섞인 역사였지만, 그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울 교훈도 남겼다.
인류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약의 지혜를 터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침팬지는 베르노니아(Vernonia) 잎을 씹어 기생충을 몰아내고, 개는 속이 불편할 때 위를 자극하는 풀을 먹는 행동이 대표적이다. 또 새들은 둥지에 아로마 성분이 풍부한 로즈메리, 타임과 같은 허브 잎을 깔아 해충을 막는 모습도 관찰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인간이 약을 사용하기 전부터 동물들이 스스로 질병을 예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최초의 약사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점은 고대에는 음식과 약의 경계가 모호했다는 것이다. 마늘은 항균 효과가 있고, 꿀은 상처 치료에 쓰였으며, 술은 소독제 역할을 했다. 당시 부엌은 사실상 약국이었고, 식탁 위 음식이 곧 치료제였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약은 섭취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약은 주술과 의례, 믿음과 함께할 때 더 큰 효능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약을 먹기 전 기도를 올리거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치유를 기원하는 주문을 외웠다. 의사는 약을 건네며 환자 곁에서 의식을 진행했고, 때로는 샤먼으로서 제사까지 집전했다. 약을 복용하는 행위 자체가 신성한 힘을 불러오는 의식이었던 셈이다.
또한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대체의학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허브 요법, 아로마테라라피, 침술, 한방 치료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이다. 과학적 근거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현대 의학이 다루기 어려운 만성 피로, 불면증, 불안 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연구도 있다. 고대의 주술적 행위가 오늘날의 웰니스 문화로 이어지고 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현대 과학이 고대의 일부 처방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음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영국의 10세기 의학서 “Bald’s Leechbook”에는 마늘, 양파, 포도주, 황소 담즙을 섞어 만든 눈 연고가 기록돼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약이 일반적인 눈병을 치료한다는 믿으며 미신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이 처방이 실제로 슈퍼박테리아(MRSA)를 억제하는 강력한 항균 효과를 나타났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연구에 따르면, 네 가지 재료가 함께 섞일 때 특정 화학반응이 일어나 항균 효과가 나타난다. 마늘의 알리신, 양파의 황화합물, 담즙의 지방산, 포도주의 알코올이 상호 작용해 세균의 세포벽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저 미신으로 치부됐던 고대의 약이 실제로 과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어 현대 의학 연구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연에서 얻은 약재는 현대 의학 연구와 신약 개발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아스피린은 버드나무껍질에서, 모르핀은 양귀비에서, 페니실린은 곰팡이에서 발견됐다. 항암제 파클리탁셀은 태평양 주목 나무에서 추출되었고, 최근에는 해양 생물과 미생물에서 새로운 치료제가 발굴되고 있다. 자연의 약국은 여전히 열려 있다. 인류 최초의 약은 그저 병을 고치는 물질이 아니라, 생존과 공동체를 지킨 지혜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의학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항생제의 오남용으로 슈퍼박테리아가 등장했고, 희귀 질환 치료제는 특허와 비용 문제로 많은 환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자연의 치료물질을 다시 탐구하고, 최신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해 신약 개발을 가속화할 필요가 있다. 결국 약의 역사는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추는 나침반이기도 하다.
[위즈덤 네이처]약이라고 하면 보통 하얀 알약이나 병원에서 받는 처방전을 떠올리지만, 사실 약의 세계는 훨씬 더 크고 신기합니다. 악어 똥이 피임제로 쓰였던 고대 이집트부터, 나무껍질에서 아스피린이 태어난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 AI가 새로운 신약을 찾는 시대까지, 약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바꿔왔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때로는 치료제, 때로는 독, 또 어떤 때는 미신이기도 했던 ‘약’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파헤쳐 보려 합니다. 위즈덤 아고라 김채희 기자의 ‘위즈덤 네이처’에서, 낯설지만 재미있는 약의 세계로 함께 떠나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