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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삶을 통해 알아보는 서대문 형무소의 의식주

독립운동가가 겪어야 했던 고통스러운 수감생활

< 유관순 열사의 모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

[객원에디터 3기 /유수임 기자] 100년 전,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생 1학년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한 유관순 열사를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유관순 열사는 일제 강점기 시기의 독립운동가로 천안에서 태어나서 당시 이화 학당의 학생이었다. 만세 운동이 시작되자, 친구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계획했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1919년 4월 1일에 만세 운동이 시작되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시위대를 이끄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만세 운동이 시작되자 일본 경찰의 탄압도 시작됐고,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도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유관순 열사 역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1908에 지어졌던 서대문 형무소는 원래 “경성 감옥”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감옥이었는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곳에 수감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전시실 중 하나에는 벽에 수감자들의 수형 기록표가 붙어 있는 전시실이 있는데, 그곳에는 유관순 열사 이외에도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수형 기록표도 남아 있다.

< 수형 기록표 전시실 사진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제공 >
5000여장의 수형 기록표가 붙어 있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수감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국제교류문화진흥원 산하 청소년문화단 해설사에 따르면, 서대문 형무소의 수감자들이 지냈던 옥사는 크기가 매우 작아서 하나에 3~5명이 지내야 하는 크기인데, 그곳에서 30~35명의 사람들이 지내서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수감자들끼리 교대로 누워 있어야 했다. 이런 불편한 옥사에서 지내면서도 수감자들은 벽관 고문이나 손톱 밑을 날카로운 쇠 막대기로 찌르는 고문, 가시가 잔뜩 있는 상자에 사람을 넣고 흔드는 고문 등 고통스러운 고문을 모두 이겨내야 했다. 유관순 열사도 이런 고통스러운 고문을 받다가 옥사에서 1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서대문 형무소 11, 12번 옥사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제공 >

서대문 형무소의 수감자들은 형을 확정 받은 사람(기결수)과 아직 확정 받지 못한 사람(미결수)으로 나뉘어 형을 확정 받은 사람은 붉은색 옷을 입고, 아직 확정 받지 못한 사람은 푸른색 옷을 입었다. 서대문 형무소 사이트에 따르면 서대문 형무소의 수감자들은 공작사라는 건물에서 일을 하며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지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수감자들의 옷도 만들었다고 한다.

< 기결수의 옷 –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제공 >
< 공작사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제공 >

<이곳은 공작사이고,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벽돌, 옷 등을 만들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수감자들을 콩(50%), 좁쌀(30%), 현미(20%)의 밥을 배급 받았고, 특별한 밥그릇을 사용했는데, 간수들은 밥그릇 속에 나무토막을 넣어서 밥이 많아 보이게 하는 속임수를 사용했다. 형량과 노역의 종류에 따라 등급을 만들어 밥의 양을 다르게 지급했다. 밥은 하루 3번, 노역을 하는 공장에서 먹었고, 양은 400그램에서 200그램까지 나뉘어져 있었지만 400그램을 받는 수감자들도 열량은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 수감자들의 밥그릇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제공 >

유관순 열사 외에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통받고 고문당한 수감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일제강점기 시대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2022년의 3월을 맞이한 지금, 약 100년 전의 3월에 일어났던 독립운동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고통을 항상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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