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위즈덤 네이처] 라쇼몽: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은, 정말 사실일까?
아니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라쇼몽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라쇼몽 영화 포스터>

[위즈덤 아고라 / 이수아 기자]

비가 내린다.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장대비. 그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 폐허가 된 라쇼몽(羅生門) 아래에 모여든다. 한 명, 두 명, 세 명.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들은 처참한 표정으로 멍하니 비를 바라보거나 땅을 내려다본다. 피곤한가? 슬픈가? 아니면,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건가?

그러다 문득 한 남자가 말을 꺼낸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자 나무꾼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끔찍한 일이 있었소.”

옆에 앉아 있던 승려가 덧붙인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석연찮은 점이 많지요.” 라며 재판에 대한 운을 뗀다. 

이제 당신도 궁금해졌을 것이다. 누군가가 죽었는데, 그게 왜 이상하단 말인가? 사람이 죽으면 죽은 것이지, 그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하지만 오늘, 라쇼몽 밑에서 듣게 될 이야기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 네 개의 증언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헤이안 시대, 깊은 숲속. 한 사무라이가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칼에 찔려 죽었다. 하지만 누가 죽였는가? 어떻게 죽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 네 명의 증인이 있다.

  • 사무라이의 아내.
  • 악명 높은 도적 ‘타죠마루’
  • 죽은 사무라이 (무녀를 통해 빙의하여 증언함).
  • 그리고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
 < OpenAI의 DALL·E 제공 >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이 네 사람은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이야기한다.

① 도적 타죠마루의 증언

악명 높은 도적 타죠마루는 칼을 고 당당하게 말을 시작했다.  

“난 그 사무라이와 정정당당히 겨뤄 죽였어. 술수 없이!”  

타죠마루는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사무라이의 아내에게 홀렸다. 순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타죠마루는 사무라이를 숲 속으로 유인했다고 한다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모든 건 그 여자가 바꿔놓았지. 문제는 그 여자야. ”  

타죠마루는 눈을 치켜뜨며 당시를 회상했다. 

“두 남자가 모두 살아있을 수는 없지요. 싸워서 이긴 사람이 저를 차지하세요.”

두 남자는 그 말에 휘말려 치명적인 결투를 벌였고, 결국 타죠마루가 승리했다. 하지만 승리 직후, 여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내가 비겁하다고? 절대 아냐!”  

그는 주먹을 쥐고 의기를 다졌다.  

“내가 떳떳하게 싸워서 그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② 사무라이의 아내의 증언

그러나 아내의 말은 전혀 다르다. 그녀는 허공을 응시한 채 말을 이었고, 손가락은 계속해서 허름한 치맛자락을 비비고 있었다.

“그 도적이… 저를 덮쳤어요.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죠.”

울음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자 그녀는 훔치듯 얼굴을 가렸다. 남편은 그저 겁탈당하는 그녀를 내려다봤다는 것이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그냥 차갑게, 마치 썩은 물처럼 저를 내려다보셨죠.”

그 시선이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무릎을 꿇고 남편의 칼집을 열어젖혔다고 한다.

“차라리 이 몸을 베어주세요. 당신의 명예를… 제가 더럽혔으니.”

“…”

하지만 사무라이는 돌처럼 굳은 채 칼자루에 손조차 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이성을 잃고 실신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가슴에 단도가 꽂힌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내가… 내가 남편을 죽인 걸까요?”

③ 죽은 사무라이의 증언 (무녀를 통해 빙의)

하지만 죽은 사무라이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내가 나를 배신했다.”

사무라이에 따르면, 도적 타죠마루는 아내를 강제로 끌고 가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타죠마루에게 달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을 없애버린 후 도망치자고 했다고 한다.

타죠마루조차 그녀의 태도에 놀랐다. 

“이 여자가 나한테까지 남편을 죽이라고 시키다니! 이보게, 당신이 이 괘씸한 여자를 죽일지 살릴지 정하게 해 주겠다. “
“…”

사무라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아내는 도망친다. 

이윽고 도적이 오히려 자신을 풀어주자 그는 도적을 마음속으로 용서하고,
결국 그는 떨어져 있던 단도를 집어 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했다.

“가슴팍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 쓰러졌소! 그런데… 깨어났을 땐 내 가슴팍에 박힌 단도가 사라져 있었네.”

④ 나무꾼의 증언 (마지막 진실?)

라쇼몽의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도적은 여자를 겁탈한 뒤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입을 열었지요.”


“이제부터 내 아내가 되시오. 달리 갈 길도 없지 않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이윽고 토죠마루가 칼을 뽑고 결투를 벌이려 하자, 사무라이는 한숨을 내쉬며 쏘아붙였다고 한다.
“이런 여자 때문에 목숨까지 걸고 싶지 않소. 내 아내라고 부르는 것도 이젠 싫군.”

빗물이 나무꾼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여자가…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더군.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사무라이를 가리켰지. ‘당신은 남편이라면서, 아내의 치욕을 씻기 위해 칼을 들지 못해?’ 그리고 도적을 돌아보며… ‘너는 도적 주제에 겁쟁이냐?’라며….”
“둘 다 겁쟁이 아니야? 자존심도 없으면서!”

“결국 여자의 독설에 휘말린 사무라이와 도적은 서로 칼을 빼 들었지만, 겉으로만 호기롭게 굴었을 뿐 실제로는 두 사람 모두 허둥대며 어설픈 싸움을 벌였지… 개싸움 같았소. 칼을 휘두르다 발이 걸려 넘어지고, 진흙탕에서 서로 머리채를 잡는… 그런 보기에도 민망한…”

승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사무라이는 어떻게…?”

“도적의 칼이 허둥대다 옆구리를 스쳤소. 사무라이는 쓰러지면서 ‘이런…’이라고 중얼거렸지. 죽기 직전까지 여자를 노려보던 눈빛이…”

나무꾼은 도적은 싸움을 마치고 여자를 데려가려 했지만, 여자는 이미 그에게 환멸을 느낀 듯 손길을 뿌리치고 달아났다고 한다. 남겨진 도적 역시 사무라이의 단검만 챙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 이야기를 전해주던 나무꾼이 말을 마치자, 곁에 있던 행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싸하긴 하지만, 정말 사실대로 본 겁니까?”

그러자 승려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이제 더는 사람 마음을 믿을 수 없게 되었소.”

행인은 비웃듯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흥, 애당초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소? 새삼스러울 것도 없군요.”

바로 그때, 어딘가에서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은 소리를 따라가 보았고, 라쇼몽 구석에 버려진 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행인은 아기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를 둘러싼 비단옷만 슬쩍 챙기려 했다. 이를 본 나무꾼이 분노를 터뜨렸다.
“당신…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오! 어떻게 아기는 내버려 두고 옷만 훔칠 수 있단 말이오!”

그러나 행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비웃으며 되받았다.
“귀신이라니? 그보다 사무라이 아내가 가지고 있던 값진 단검은 어디 갔을까요? 사건 현장에는 없었다던데.”

그 단검을 슬쩍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무꾼이었다. 진실이 드러나자 나무꾼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그 역시 이야기를 제멋대로 꾸며 말했음이 밝혀진 것. 그는 단지 구경만 한 방관자가 아니라, 이 사건에 직접 발을 담근 당사자 중 한 명이었다.

라쇼몽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아니다.
“진실이 존재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숨기고 왜곡한다”는 점이다.

도적 타죠마루는 자신의 행동을 영웅적인 싸움으로 포장했다.
아내는 자신의 행위를 비극적인 운명으로 바꿔 말했다.
사무라이는 자신이 배신당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무꾼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거짓을 말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기억을 조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조작된 기억을 ‘진실’이라 믿어버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은, 정말 사실일까?
아니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라쇼몽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기억이란 절대적이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왜곡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기억하는 모든 것은 과연 진짜인가?
진실은 단 하나인가? 아니면, 우리가 관측하는 순간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인가?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라쇼몽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억은 언어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

<Knowles, J. (2022, September 23). The scourge of the leading question – Bootcamp – Medium. Medium. https://medium.com/design-bootcamp/the-scourge-of-the-leading-question-98121cc4ebf2 >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는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로프터스와 동료들은 참가자들에게 짧은 교통사고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 사고는 두 대의 자동차가 충돌하는 장면이었다. 영상을 본 후,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질문은 미묘하게 달랐다.

한 그룹에게는
“차가 부딪혔을 때 얼마나 빨랐습니까?”라고 물었고,

다른 그룹에게는
“차가 박살 났을 때 얼마나 빨랐습니까?”라고 물었다.

‘부딪혔다(hit)’와 ‘박살 났다(smashed)’
이 두 단어의 차이가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부딪혔다”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들은 평균 속도를 시속 34마일로 기억했다.
“박살 났다”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들은 같은 사고를 보고도 시속 41마일로 기억했다.

단어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기억 속 자동차의 속도가 무려 7마일이나 차이 난 것이다.

질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억이 변형된다면, 실제로 거짓된 사건을 기억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연구팀은 후속 실험을 진행했다.

 < OpenAI의 DALL·E 제공 >

일주일 후, 실험팀은 참가자들에게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사고 장면에서 유리 파편을 보았습니까?”

실제로 실험 영상에서는 유리 파편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살 났다”라는 단어를 들은 참가자들 중 32%가
“유리 파편이 있던 것을 기억한다.”라고 답했다.

반면, “부딪혔다”라는 단어를 들은 참가자들은 14%만이 유리 파편을 보았다고 말했다.

단순한 단어 하나가 참가자들의 기억을 조작한 것이다.
“박살 났다”라는 표현을 들은 참가자들은 더 격렬한 사고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에 맞춰 존재하지도 않았던 유리 파편을 기억 속에 추가한 것이다.

반드시 진실? Yes Or No 

1984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평범한 밤. 제니퍼 톰슨은 그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한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순간, 그녀의 뇌는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나는 이 남자의 얼굴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공포 속에서도 그녀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눈썹, 코의 각도, 입술의 형태, 모든 세부 사항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나중에라도 그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경찰은 용의자를 체포했다. 몇 명의 남성이 줄지어 서 있는 신원 확인 절차에서, 그녀는 단호하게 한 남자를 가리켰다.

“바로 이 남자예요. 내가 그를 기억해요. 100% 확신합니다.”

그녀의 증언은 강력했다. 피해자가 직접 범인을 지목했고, 그녀의 기억은 너무나도 확고해 보였다. 배심원들도 그녀의 말에 주목했다. 결국, 그 남성, 로널드 코튼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강간죄로 1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로널드 코튼의 범인 식별용 사진  <출처 :Slate Magazine >.

로널드 코튼이 감옥에서 보낸 11년 동안, 그는 줄곧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직접적인 피해자의 증언보다 강력한 증거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과학 수사는 지금처럼 정밀하지 않았다. 범죄 수사는 목격자의 기억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피해자가 직접 증언하는 순간, 대부분의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1995년, DNA 분석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새로운 검사를 진행한 결과, 로널드 코튼은 결백했다.

진범은 전혀 다른 남성이었다.

제니퍼 톰슨의 경우, 사건 당시의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가 그녀의 기억을 왜곡했다. 트라우마가 강할수록, 뇌는 특정 세부 사항을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불완전한 정보를 채우려 한다.

게다가, 경찰이 신원 확인을 진행하는 방식도 문제였다.

  1.  경찰이 그녀에게 용의자 중 한 명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암시했다.
    즉, 제니퍼는 “범인이 이들 중 한 명일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선택을 해야 했다. 실제 범인이 그곳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뇌는 가장 비슷한 얼굴을 자동으로 범인으로 인식했다.
  2.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기억이 더욱 확고해졌다.
    한 번 특정한 얼굴을 범인으로 인식하면, 뇌는 그것을 점점 더 강화한다. 마치 오래된 사진을 반복적으로 보면서 그 사진 속 인물이 점점 더 익숙해지고, 다른 가능성은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거짓 기억 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이라고 부른다.

기억의 신뢰성: 법정에서의 위험성

 < OpenAI의 DALL·E 제공 >

이 실험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기억이 부정확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선다.
법정 증언, 특히 목격자의 증언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만약 경찰이나 검사, 변호사가 용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가 당신을 강하게 밀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는
“그가 당신을 살짝 밀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을 때와 전혀 다른 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

법정에서 목격자가 증언하는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오히려, 변호사와 검사의 질문 방식,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제공된 정보에 의해 조작될 가능성이 높다.실제로, 수많은 억울한 유죄 판결이 잘못된 목격자 증언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이노센스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에 따르면,
잘못된 목격자 증언이 75% 이상의 오심(誤審, wrongful conviction)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과학] 기억은 뇌신경이 일으키는 `전기작용`. (2010, March 10).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economy/4694386> .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대니얼 샥터는 그의 저서 The Seven Sins of Memory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에서 기억의 오류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인간의 기억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조각난 정보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 신념, 외부 환경 등이 개입하여 기억을 변형시킨다고 주장했다.

이는 신경과학적으로 해마, 편도체, 전전두엽의 상호작용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기억이 단순히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감정과 기존의 신념, 외부 정보에 따라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동일한 사건을 경험했더라도, 사람마다 해마가 기억을 인코딩하고 검색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기억의 내용도 달라질 수 있다.

 < OpenAI의 DALL·E 제공 >

예를 들어 당신이 어린 시절 놀이공원에서 풍선을 잃어버렸다고 해보자. 그때 당신은 풍선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크게 울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그 비싼 풍선을 잃어버리다니!”라며 살짝 혼내셨을 테고, 그 일이 마음에 깊이 남아 풍선만 보면 슬픈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가족들이 이렇게 말해준다면 어떨까? “너 그때 풍선 잃어버리고 엉엉 울던 거 기억나?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봤어. 그런데 울면서도 또 풍선 사달라고 조르는 네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 말을 듣고 나면, 슬프고 속상했던 기억은 점점 웃기고 귀여운 에피소드로 바뀌기 시작할 수 있다. “그때 내가 울긴 했지만… 귀여운 추억이었나 보네!”라며 어린 시절을 긍정적으로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처럼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장면을 그대로 저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이나 친구들의 이야기, 현재의 감정과 관점에 따라 점점 변형된다. 결국 놀이공원에서의 풍선 사건은 슬픈 기억이라기보다는 가족끼리 웃으며 나눌 수 있는 사랑스러운 추억으로 재구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뇌는 어떻게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일까?

첫째로 해마의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자. 해마는 기억의 저장과 검색을 담당하는 주요 뇌 구조다. 해마의 역할은 단순히 정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의미적으로 조직하고 저장한다. 즉, 해마는 우리가 경험한 사건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편집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해마가 기억을 단순히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때 전전두엽이 개입하면서 기억의 논리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화된다. 인간의 뇌는 정보가 모순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정리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이 과정에서 기억의 일부가 삭제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특정 사건에서 강한 두려움을 느꼈다면, 전전두엽은 이 기억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두려움을 증폭시키거나 사건을 더 극적인 형태로 기억하도록 수정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인간이 트라우마를 경험할 때 기억이 왜곡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이 아니라, 신경망이 정보를 조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변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동일한 사건을 경험한 두 사람도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질 수 있으며, 같은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기억을 다르게 떠올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 지식채널 e 1436회 ‘기억’ 에피소드 >

또, 편도체는 공포, 불안, 분노와 같은 강한 감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며, 이러한 감정적 요소가 기억의 저장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1977년 브라운과 쿨릭의 연구에 따르면, 감정적으로 강렬한 사건은 섬광 기억을 형성한다고 주장되었다. 섬광 기억이란 매우 선명하고 생생하게 기억되는 경험을 의미하며, 예를 들어 9·11 테러와 같은 대규모 사건이나 개인적인 충격적인 경험 이후에 자주 나타난다. 다만 같은 시간,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그 순간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받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되새기지 않는 경우 섬광 기억은 찾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기억은 의도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이 자동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인 기억보다는 부정적인 기억이 더 쉽게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큰 공포를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나중에 수영장에 가거나 물 근처에 있을 때 그 기억이 떠올라 물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뇌가 과거의 위협적인 상황을 기억해 두고, 다시 비슷한 상황에서 경고 신호를 보내는 본능적인 반응인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종종 공포, 두려움과 같은 강렬한 감정이 그 기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 뇌는 이러한 감정을 통해 과거의 실수를 기억하고, 유사한 상황에서 미리 준비하도록 돕는다. 쉽게 말해, 우리의 뇌는 과거의 교훈을 경고로 활용하여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신경과학적 연구는 이러한 섬광 기억조차도 완벽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2003년 탈라리코와 루빈의 연구에 따르면, 9·11 테러 당시 뉴욕에 있었던 사람들은 테러 발생 직후에는 매우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었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질문했을 때 기억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었거나 잘못된 정보로 대체되었다.

이는 편도체가 해마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감정적으로 강렬한 사건이 발생하면, 편도체는 해마와 상호작용하여 그 사건을 더 강하게 부각하고 저장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편도체의 감정적 반응이 감소하면, 기억의 핵심 요소는 남아 있는 동안 세부 정보는 사라지거나 변형될 수 있다.

인지 부조화: 불편한 진실을 피하려는 심리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합리적이고 일관된 존재”로 여기고 싶어 한다. 스스로 옳은 선택을 했다는 믿음은 불안과 의심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행동과 신념이 충돌하는 상황을 마주하면,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이 자리 잡는다. 이처럼 자신의 내적 신념과 외적 행동이 충돌하여 생기는 심리적 갈등을 가리켜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1957년에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정의했다.

 < OpenAI의 DALL·E 제공 >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 “나는 정직한 사람이다.” 

✔ “나는 친구에게 거짓말을 했다.” 

위와같이“나는 정직한 사람이다”라는 신념과 “친구에게 거짓말을 했다”라는 사실이 충돌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선택지를 떠올린다.

  1. 신념을 수정한다.
    → “어쩌면 내가 늘 정직한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다.”
  2. 기억을 수정한다.
    → “내가 친구에게 한 말은 사실 거짓말이 아니었어.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표현이었을 뿐이야.”
  3. 행동을 정당화한다.
    → “나는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야.”
  4. 새로운 신념을 만든다.
    → “가끔은 거짓말이 필요할 수도 있지. 그러니 나는 여전히 정직한 사람이야.”

이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방안인 ‘신념 자체를 바꾸는 것’을 가장 꺼린다. 그래서 1번을 선택하는 대신, 나머지 2,3,4번을 선택한다. ‘정직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뒤집는 것은 자존감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기억을 왜곡하거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새로운 신념을 창조함으로써 기존의 자아상을 유지한다. 그리고 라쇼몽 속 등장인물들  모두 이 과정을 거친다. 단순히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다. 

  • 타죠마루(도적): “나는 정정당당한 결투로 사무라이를 죽였다.” → 자기합리화
  • 사무라이의 아내: “나는 피해자였다. 내가 한 행동은 불가피했다.” → 자기방어
  • 죽은 사무라이: “나는 자결했다. 나는 배신당한 희생자였다.” → 자기합리화
  • 나무꾼: “나는 사건을 지켜본 관찰자일 뿐이다.” → 책임 회피

단순히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이들은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불편한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스스로를 납득한다. 부조화를 줄이는 과정 속에서, 각자의 시선에서 ‘합리적’인 버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우리의 뇌가 가진 자연스러운 방어 기제와 맞닿아 있다.

1. 편도체: 

<https://commons.m.wikimedia.org/wiki/File:Amygdala.png>

불편한 기억을 ‘약화’하거나 ‘억제’하기

  • 과도한 부정적 감정을 줄이기: 

편도체는 몸과 뇌가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지나치게 충격적인 기억을 부분적으로 약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일종의 방어 기제로, 만약 우리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100% 생생하게 느낀다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리적 피해가 커질 수 있다.

  • 트라우마의 재구성: 

어린 시절 학대를 경험한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도 “그래도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셨다”라고 생각하려 하거나, 혹은 학대 자체를 기억 못 하는 상황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자기기만”이 아니라, 뇌의 ‘정서 처리 기제’가 작동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학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어린아이에게는 “부모님이 나를 해쳤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아이는 “나는 부모에게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 나아가 “내 존재가치가 없다”와 같은 극단적인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편도체는 이런 극단적 불안과 무력감을 피하기 위해, 부모님을 미화하거나 “진짜 학대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기억을 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또는 편도체가 ‘위협감’, ‘불편함’을 줄이고자 할 때, 다른 부위(전전두엽, 해마 등)와 상호작용하면서 합리적 이유나 해석을 찾게 한다. 그래서 “그래도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셨을 거야”, 혹은 “부모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처럼 자기 합리화가 구축된다.

편도체와 HPA 축(Hypothalamic-Pituitary-Adrenal axis)

  • 편도체는 시상하부(Hypothalamus)를 통해 호르몬 분비 체계를 조절하는 능력, 신체적 스트레스 반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 스트레스 호르몬(코르티솔 등)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편도체는 감정적 흥분 상태를 지속시키고, 동시에 다른 뇌 영역과의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다. 
  • 이때 뇌는 생존을 위해 적응적 방어(기억 왜곡, 자기 합리화 등)를 가속화하기도 한다.

2. 전전두엽: 

<Hathaway, W. R., & Newton, B. W. (n.d.). [Figure, Prefrontal cortex Image courtesy O.Chaigasame] – StatPearls – NCBI Bookshelf. https://www.ncbi.nlm.nih.gov/books/NBK499919/figure/article-27617.image.f1/?report=objectonly >
  1. 논리적 포장
    • 편도체가 정서적 고통을 줄이려 한다면, 전전두엽은 계획, 논리적 추론, 충동 억제, 자기 성찰 등 고등 인지 기능을 담당한다. 특히 우리가 “무언가를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예컨대, “내가 맞기는 했지만, 그건 나를 잘 키우기 위해서였어”와 같은 식으로 합리적 이유를 붙여 “부모의 행동=사랑”이라는 공식을 세운다. 이런 방식으로 전전두엽은 “그 행동이 옳았는지, 나쁘지는 않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득해 내어, 스스로 느끼는 불편함을 줄여준다.
  2. 전전두엽의 하위 영역들
    • 배외측 전전두엽(Dorsolateral PFC): 논리적 추론, 문제 해결, 작업 기억(Working memory) 등.
    • 복내측 전전두엽(Ventromedial PFC) / 안와전두피질(Orbitofrontal Cortex): 감정 조절, 보상과 처벌에 대한 의사결정 등.
    • 이들 영역이 감정적 정보를 처리하는 편도체와 긴밀히 소통하면서, “이 행동은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혹은 반대로 “이건 위험해”라고 판단해 억제하기도 한다.
  3. 인지 부조화 해소
    • “부모가 나를 학대했다”는 사실과 “부모는 나를 사랑했다”는 신념이 충돌할 때, 우리는 극도의 불편함(인지 부조화)을 느낀다. 전전두엽은 그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부모의 폭력은 잘못된 표현이었을 뿐, 근본적으로 사랑했던 것 ”이라는 식으로 타협점을 찾아내고, 자기 합리화를 이어간다. 이러한 합리화 과정을 통해 “나는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야”, 혹은 “나는 부모님의 진심을 오해한 게 아니야”라는 신념을 지키면서, 동시에 자존감을 방어할 수 있게 된다.

3. 해마: 

<잘못된 기억의 파편, 해마가 문제. (2010). https://www.brainmedia.co.kr/BrainScience/439
  1. 기억 저장
    해마는 대뇌의 측두엽 깊숙이 위치하며, 새로운 정보를 장기기억으로 전환하고, 필요한 시점에 기억을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명확히 떠올린다’고 말할 때, 그 배후에는 대부분 해마의 활동이 있다. 보통 사건의 ‘사실관계’는 해마가 담당하고, 사건에 수반되는 감정은 편도체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트라우마가 심할수록, 해마는 기억을 조각조각 분산하거나 단편적으로 저장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기억이 뚜렷하게 이어지지 않고 파편처럼 느껴지는 이유)
  2. 감정과 사실이 뒤섞임
    • 학대 사실을 정면으로 인정하면 극심한 공포, 분노, 배신감 등이 생긴다. 편도체가 이를 완화하기 위해, 해마에 이미 저장된 사실 관계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거나, “나쁜 기억”을 닫아두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 결과적으로, 사실이 왜곡된 형태로 남아 “그래도 사랑받았다”라는 결론이 만들어질 수 있다. 
    • 다른 예로는, 연애 중 상대방의 결점을 애써 보지 않던 시절에는, 해마가 주로 ‘장점을 저장’하고 ‘애정 어린 장면’을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이별 후에는 “어쩐지 모든 게 별로였던 것 같아”라며 부정적 기억만 콕 집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는 단순히 감정 탓만이 아니라, 해마가 현재의 감정 상태(“실연의 슬픔” 혹은 “분노” 등)에 부합하도록 지난 기억을 편집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세 영역이 상호작용하여 ‘자기 합리화’라는 메커니즘을 실현한다. 우리가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때로는 기억을 바꾸고, 행동을 미화하며, 새로운 신념을 만들어내는 심리적 이유에는 이러한 뇌과학적 토대가 깔려 있다. 이에 따라 파생된 이론이 있다. 바로 기억 재결합(Reconsolidation) 이론이다.

기억 재결합이론은, 이미 저장된 기억도 다시 꺼내(회상)지는 순간 일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 새로운 정보와 결합하거나, 혹은 수정·삭제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20세기 중반까지, 기억은 ‘한 번 안정적으로 저장되면 변하지 않는 구조’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 Karim Nader의 동물실험이 이 통념을 뒤집었다. 학습된 공포기억(예: 쥐에게 특정 소리와 충격을 연계)을 다시 불러오게 한 뒤, 단백질 합성을 차단하자 기존 공포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1. ‘재활성화-재결합’ 개념
    • 재활성화(reactivation): 한 번 저장된 기억을 회상하는 순간(학습 시 사용된 자극, 조건 등을 다시 제시).
    • 재결합(reconsolidation): 재활성화된 기억이 새로운 정보와 결합하거나 변형된 형태로 다시 고정되는 과정.
    • 이때, 단백질 합성 등 세포 수준의 기전이 활성화되며, 마치 ‘처음 학습할 때와 유사한’ 생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
< An Update on Memory Reconsolidation Updating Lee, Jonathan L.C. et al.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Volume 21, Issue 7, 531 – 545>
  1. 시냅스 변화
    • 기억이 재활성화되면, 해당 신경회로(특정 뉴런들과 시냅스 연결)가 잠시 불안정한(가소성 높은) 상태가 된다.
    • 이때 단백질 합성 억제제(예: 애니소마이신) 등을 투여하면, 기억이 다시 안정화되지 못하고 흔들려버려 ‘소실’ 또는 ‘약화’될 수 있다.
  2. 장기적 강화(Long-Term Potentiation, LTP)와 유사한 단백질 합성
    • 재결합은 다시 한번 ‘단기 기억 → 장기 기억’으로 옮기는 과정과 비슷한 분자적 기전을 요구한다다.
    • 특정 유전자 발현, 단백질 합성, 시냅스 구조 변화 등을 거쳐야 최종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안정화’가 이뤄진다.

공포 조건화 실험(쥐 실험)

  • 1단계(학습): 소리(A) + 전기 충격 → 공포 반응 학습.
  • 2단계(재활성화): 시간이 지난 뒤, 소리(A)만 재생 → 공포 기억이 떠오름.
  • 3단계(차단 / 변경):
    • 만약 이 시점에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거나, 기억과 상반되는 안전한 경험(“이번에는 충격이 없네?”)을 강하게 학습시키면, 기존 공포 기억이 약해지거나 새롭게 덮어씌워짐.
    • 재결합이 완료되면, 소리(A)에 대한 반응이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게 됨.

임상적 함의: 트라우마 치료

  • 이 이론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트라우마 치료에도 사용된다. 트라우마가 재활성화되는 순간(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에 적절한 치료(안정감 부여, 이완 기법 등)를 적용하면, 그 트라우마 기억을 ‘재결합’ 과정을 거쳐 조금씩 약화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실제로 ‘Propranolol’(베타 차단제) 등을 이용하여 재결합 시점에 공포 반응을 줄이는 연구 등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매일 스스로를 속인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한다.
✔ 도박 중독자의 자기합리화

“이번에는 운이 없었을 뿐이야. 다음 판에서는 무조건 이길 거야.”

✔ 흡연자의 자기합리화

“내 친구는 매일 담배를 피우는데도 건강해. 그러니까 나는 괜찮을 거야.”

✔ 시험 성적과 책임 회피

“시험이 너무 어려웠어.” (내가 공부를 덜 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음)

✔ 스포츠 경기에서의 편향된 기억

“우리 팀이 반칙을 하면 실수지만, 상대팀이 반칙을 하면 부정행위다.”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갑자기 완전히 ‘객관적’이 되기는 어렵다. 우리의 뇌는 생존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이해하면, 자신과 타인의 말과 행동 뒤에 숨은 심리적 배경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왜 나(혹은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생각을 바꿨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 그 뒤에는 뇌의 복잡한 작동 방식이 있음을 떠올려 보자. 뇌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기억을 왜곡하는 방식을 택하곤 한다. 

결국, 인지 부조화는 인간이 생존과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시킨 심리적 ‘안전장치’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 또는 자신의 선택이 납득되지 않을 때, 먼저 “무슨 불편함을 느꼈을까?”를 고민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모순될 때 찾아오는 불편함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기보다는, 그 불편함 자체를 인정하고 마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지 부조화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이를 의식하고 성찰한다면 더 성숙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라쇼몽의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른 진실을 말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기억을 재구성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한다면, 자기 합리화에 빠진 타인을 비난하기보다는 인간이 가진 본능적 방어 기제를 수용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려는 스스로를 조금 더 너그러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의 뇌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진실이 변형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이해의 시작일지 모른다.

[위즈덤 네이처] 자연과학의 지식을 동원하여 뇌과학과 정신건강, 심리를 비추는 새로운 시리즈, 이수아 기자의 ‘위즈덤 네이처’의 시작을 알립니다. 복잡한 세상살이와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데 과학이 어떻게 호기심을 풀어나갈지, 일상에서 만나보는 궁금했던 과학의 세계를 만나보세요.

Leave a Reply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