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모자의 변천사
한국 모자 문화의 발전
[객원 에디터 3기 /박시우 기자] 오랜 옛날 모자가 발명된 이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의 모자를 써왔다. 모자는 지위를 과시하거나, 체온을 보존하거나, 멋을 뽑내기 위한 의상으로 전 세계에서 발전해왔는데, 오늘날 세계에는 다양한 모습과 용도를 가진 모자들이 존재한다. 이중 우리나라는 특히 다양한 복잡하고 섬세한 모자 문화가 발달했다. 요즘에는 음악, 음식과 같은 한류 문화들과 함께 갓으로 대표되는 모자 문화도 세계적인 유행으로 번지고 있다. 이런 우리나라의 모자는 어떻게 기원했으며, 또 변화하여 지금의 형태가 되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모자를 착용해왔다. 상고시대에 조상들이 사용하던 고유의 모자인 변상의 관모는 두 헝겊이나 가죽 조각을 이어붙여 앞에서 삼각형 모양이 보이도록 만든 것으로, 높은 신분을 가진 귀족들은 이런 관모에 새의 깃털을 장식했으며, 이는 북방 민족의 문화에서 기원했다. 또한, 우리 조상들은 한 장의 헝겊 또는 가죽으로 머리를 가려 햇살을 막는 것과 같은 실용성에 집중한 ‘입’을 착용하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는 나라마다 다른 방식의 모자를 썼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부여 사람들은 모자를 금과 은으로 장식했고, 고구려 사람들은 신분과 관직에 따라 무후책, 절풍 변 등 다른 모습의 모자를 착용했으며, 신라 사람들은 유자례라 불린 관과 흑건을 입었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왕관 문화가 발전하였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왕관을 착용했다. 백제의 왕과 귀족들은 비단 모자 위에 금동관을 쓰고 서로 다른 장식으로 신분을 구별했고, 고구려의 왕들은 타오르는 불꽃이나 날아가는 구름을 묘사한 장식을 금관에 붙여 착용했고, 신라에서는 왕족들이 금으로 만든 관을 옥으로 장식해서 사용했다. 하지만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 중국식 모자와 의상이 유행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금관이나 모자는 사라지거나 중국식 문화의 영향을 받은 채 변화하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에서 유래한 모자인 복두를 모든 백성들이 두루 사용했다. 또 관리들은 보편적인 모자와 다른 형태를 가진 흑건을 착용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고려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고려에 간섭하던 몽골의 영향을 받아 정부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몽골식 모자인 발립을 착용했다고 한다. 발립은 위쪽이 둥글고 바깥쪽이 펴져 있으며, 안쪽은 밖과 다른 색으로 장식된 모자로, 원나라 관리들이 착용했다. 이후 공민왕 시절에는 갓의 일종인 흑립을 관리들의 복장 중 하나로 지정하였다.
조선시대의 모자들은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것들이 다양하다. 조선시대 남자들은 흑립, 복건, 삿갓, 초립과 같은 모자를 착용했고, 여자들은 전모, 너울, 족두리, 조바위 같은 모자들을 썼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갓의 최종 발달 형태인 흑립, 백립을 특히 즐겨 쓰며 소중히 여겼는데, 비가 오면 위에 갈모를 써서 보호했고, 비단끈으로 머리에 고정했으며, 값비싼 나무로 갓통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을 때는 갓통에 넣어서 보관했다. 또한, 일부 모자는 쓸 수 있는 신분과 지위가 정해져 있었는데, 익선관, 면류관, 통천관은 왕만이 쓸 수 있는 모자였으며, 전립은 군인과 왕만이 착용할 수 있었고, 자신의 지위와 맞지 않는 모자를 쓰는 관리는 유배형을 당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의 문관 관리들은 실내에서도 항상 모자를 착용해야 해서 방관, 사방관, 동파관, 정자관 같은 모자들을 사용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모자 문화는 빠르게 쇠퇴하여, 현재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모자를 쓰지 않고 모자를 썼을 때의 예법 등도 잊혔다. 하지만 최근에 각종 한류 콘텐츠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의 섬세한 모자 문화도 널리 알려지게 되어서, 다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통 모자에 관한 관심이 늘 것으로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