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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씻기의 위대함, 그 속에 이그나즈 제멜바이스

손씻기 이론의 역사

[객원에디터 1기/박서진 기자] 2020년 초반을 기점으로 하여,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급증하게 늘어나면서, 각종 뉴스, 매체, 그리고 병원에서는 손 씻기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자칫해서 손 씻기의 중요성을 주장했다가는 악마로 취급당했다. 그게 바로 처음으로 손소독 이론을 제시한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이다. 

<출처: Wikipedia>

이그나즈 제멜바이스는 1818년도 헝가리에서 태어난 의사이다. 그가 일한 곳은 바로 비엔나 종합병원의 산과 병동이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는 사생아로 태어나는 아이가 살해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 기관이 설립되고 있었다. 이 병원에는 분만 클리닉이 2곳이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1847년 기준, 산모 1000명당 98.4명의 사망률, 두 번째 병동에서는 1000명당 36.2명이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첫번째 병동에 입원하는것을 기피했다고 한다. 이 병동은 시설이 차이 나지도 않고, 굳이 다른점이라고 하면 바로 한 곳은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돌보는 곳이고, 다른 한 곳에서는 산파들이 산모를 돌봤다. 당시에 사람들은 이 차이가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단순히 “더 거칠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이러한 정설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제멜바이스가 부검을 하던 도중, 자신의 동료 한 명이 해부 실험을 하다 손이 잘려 사망한 것을 본 후, 그 발병 원인이 산욕열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이 사건을 단서로 제공했다. 그러고는 머리를 굴렸다. “해부실에 있던 의사들이 ‘시체에서 나온 입자’를 분만실로 옮겨갔을 가능성도 있을까?” 그 후, 제멜바이스는 곧바로 분만실에 달려가 의대생들을 열심히 관찰하였다. 그 결과, 의대생들이 부검실에서 일종의 사체 입자를 손에 묻힌 후 첫 번째 병동의 환자들에게 전파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직후, 그는 염소 처리된 석회 용액을 가득 담은 대야를 설치했다. 그리고, 해부실에 있다 분만실로 가는 의사들은 산모를 돌보기 전에 소독액을 사용해 손을 씻게 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1848년 의대생 병동의 산모 사망률이 1000건당 12.7건으로 감소했다.

비참한 최후
하지만, 아무도 그의 세균 이론을 믿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그의 비판자들에게 “암살자”라고 부르는 등 비난을 하며 낙인찍었다. 논란이 커지자, 비엔나 병원은 제멜바이스와의 계약을 끊고, 제멜바이스는 고향인 헝가리로 돌아와 한 병원의 산부인과 병동에서 무보수로 명예의사일을 하였다. 결국 그는 균형을 잃어가며 1865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정신병원에 데려간 것은 그의 동료 중 한 명이었으며, 제멜바이스에게 새로운 의료기관을 방문해보자고 설득하고는 정신병원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제멜바이스가 상황을 눈치채자, 그는 도망치려 했지만, 경비원들은 그를 심하게 폭행했다. 그로부터 2주 후 제멜바이스는 오른손에 난 상처에서 시작된 감염으로 47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멜바이스의 손 씻기 이론은 그의 사후 프랑스 미생물학자 루이스 파스퇴르의 세균 이론이 확립하면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후세대에 아주 중요하고 쓸모 있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뒤에나 자신의 연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 손 씻기는 병원, 집, 모든 곳에서 그 무엇보다 감염을 예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그 속에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의 노력, 연구가 있었다는것은 재조명받아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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