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 OpenAI의 DALL·E 제공 >

[위즈덤 아고라 / 박송아 오피니언 투고]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우리는 오늘 어떤 옷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어떤 경로로 이동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는 다양한 기준을 고려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효율성과 개인적 기호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가까운 경로를 선택하거나, 개인의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음식을 고르는 것처럼 우리의 선택은 종종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만족을 얻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도덕적 가치, 사회적 책임, 장기적인 결과를 고려해야 하는 선택도 존재한다. 보통 선택은 우리의 삶을 소소하게 바꾸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지하철에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상황부터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의 운전사가 생사를 가르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도덕적 판단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히 개인적인 선호가 아니라, 옳고 그름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옳은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은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관점을 제공한다.

정의는 오랜 세월 동안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주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평등과 분배로 나누어 설명했다. 현대 철학자인 롤스는 정의를 “공정함”으로 정의하며, 사회적 불평등이 허용되려면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득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의는 단순히 이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과 판단 속에서 정의의 기준은 끊임없이 시험받는다.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는다.. 공동체의 행복은 그 구성원들의 행복의 총합으로, 어떤 행동이 공동체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행복을 감소시키는 경향보다 더 클 경우 그 행동은 공리의 원리에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마땅히 이 원리에 일치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모든 이해당사자의 최대 행복은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인간 행동의 목적이다. 쾌락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위는 옳은 행위이며,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행위는 그릇된 행위이다. 즉, 어떤 행동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쾌락과 행복을 가져다줄 때, 그 행동은 도덕적으로 옳다고 평가된다. 

제러미 벤담이 공리주의를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산업혁명과 계몽주의의 시대적 흐름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영국 사회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도시 인구의 증가, 빈부격차 심화, 노동자 착취, 열악한 노동 환경 등의 문제를 겪고 있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귀족과 지배 계층이 특권을 누리는 상황에서 법과 제도가 소수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벤담은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한 사회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 즉, 평범한 시민들을 위해 보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도덕 원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당시 도덕 철학은 여전히 종교적 교리나 자연법사상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았고, 도덕적 판단이 감정이나 관습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은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강조했으며, 벤담 역시 도덕적 원칙이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존재라고 보고, 도덕적 판단 역시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바탕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적 행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공리주의를 제시했다. 

또한, 벤담이 공리주의를 주장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법과 정책을 개혁하려는 목적에 있었다. 당시 영국의 법률 체계는 매우 복잡한 관습법에 의한 것이었고 엄격했으며, 범죄에 대한 처벌도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단순한 절도에도 사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법이 일부 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벤담은 법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법률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을 평가하는 기준이 형벌의 강도나 전통이 아니라, 그 법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실제로 얼마나 많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의 운전사가 한쪽 선로에 있는 한 명과 다른 선로에 있는 다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벤담은 다수를 살리는 방향을 선택하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선택이 다수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통해 엘리베이터 설치가 이루어지고, 더 많은 사람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정의로운 결과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한계는 명확하다. 인간의 쾌락과 고통을 수치화하는 것이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지, 소수의 희생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대표적인 예로 세계 2차 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이 한 선택이 있다. 당시 영국 런던은 독일의 무차별 폭격을 당하고 있었다. 이 무렵 독일은 V1 로켓을 이용해 런던을 폭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처칠은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V1 로켓은 작은 프로펠러의 회전량을 계산해 연료공급을 끊어 폭격하는 식이었다. 이로 인해 V1의 명중률은 25% 정도였고 이 낮은 명중률로 인해 독일은 총리공관 등 중요 건물이 있는 런던 중심부가 아닌 런던 남쪽의 도시들을 폭격하고 있었다. 이는 독일의 잘못된 정보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놔뒀다간 독일스파이들이 알게 되어 본국에 보고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처칠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만일 이대로 간다면 독일이 런던 중심부를 폭격하게 되고, 영국의 중심인 자신이 있는 총리공관을 포함한 중심건물의 파괴 및 중심인물이 죽을 수 있다. 그로 인해 다른 방법을 고안하게 된다. 바로 독일이 런던에서 한참 떨어진 스코틀랜드를 폭격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독일은 더욱 남쪽을 폭격하게 되므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무고한 남쪽 사람이 죽을 수 있다. 이들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처칠은 런던이 아닌 남쪽 도시의 피해를 선택하였다. 이 사건은 공리주의 대표적 일화가 되기도 했다. 처칠은 영국 전체의 수천만 국민을 위해 3천 명을 희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 3천 명의 유가족은 어쩔 것인가? 과연 많은 사람을 위해 소수를 희생한다 해도 그 소수의 입장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인가? 남은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라는 의문들이 남는다.

한편 의무론자인 칸트는 도덕적 행위를 평가할 때 결과가 아닌 의도를 강조한다. 즉, 내가 하는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한 법칙이 될 수 있어야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칸트의 윤리학에서 선의지는 단순한 이익이나 보상이 아닌, “그것이 옳기 때문에” 선행을 실천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때 늘 자발적 의지를 의식하며, 이를 통해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 즉, 인간은 이성적이고 자발적으로 보편적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할 때만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도덕법칙은 정언명령으로 표현된다. 칸트는 정언명령을 여러 공식으로 설명했는데, 그중 하나는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칙으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행위할 때, 그 행위의 원칙이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려는 사람은 “내가 원하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도 된다”는 준칙을 따르는 것이지만, 이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원칙이므로 도덕적이지 않다.

또한, 칸트는 도덕적 명령을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으로 구분하며, 이 둘의 차이를 강조했다. 가언명령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건부 명령으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행동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마음이 불편하니까 자리를 양보한다”거나 “다음 역에서 내릴 것이니까 양보한다”는 행위는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이므로 가언명령에 해당하며,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는 도덕적 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 반면, 정언명령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명령으로, 행위의 결과와 상관없이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 도덕적 명령이다. 즉, “도덕적 법칙을 따르는 것이 옳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정언명령에 해당하며, 이러한 행위만이 진정으로 도덕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는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은 보편적 도덕법칙을 의식할 수 있으며, 이를 따를 때만이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1년 고 이수현 씨(당시 26세)가 일본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 희생한 사건은 칸트의 의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지만,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순수한 의지에서 비롯된 행위이기에 도덕적으로 옳다. 칸트는 또한 지하철에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를 의무의 관점에서 본다. 이는 어르신을 존중하는 것이 보편적 도덕 법칙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단순히 내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법칙”으로 만들 수 없다고 보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 상황에서 벤담은 다수를 살리는 방향으로 기차를 조종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지만 칸트는 특정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판단한다. 누군가가 돈을 흘리고 간 경우, 벤담은 흘린 돈을 돌려주는 것이 더 큰 행복을 가져온다면 돌려주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보지만, 칸트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돌려주는 것은 보편적 도덕 법칙이므로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뇌사 환자의 장기 기부에 대해서 벤담은 장기 기부를 통해 다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이를 권장하지만, 칸트는 환자의 동의가 없는 장기 기부는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행위로 간주되므로 비도덕적이라고 본다.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은 모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정의를 완벽하게 설명하기에는 각자의 한계가 있다. 정의란 단순히 다수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보편적 윤리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단순히 다수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포함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노력이다. 내가 선택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공정성과 도덕성이다. 이는 단순히 나의 이익을 넘어 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정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인간 존엄성을 지키고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려는 노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정의의 기준이 아닐까? 이러한 정의관은 우리의 일상 속 선택에서부터 사회 전체의 시스템까지 영향을 미친다.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는 정의로운 기준을 고민하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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