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으로 물들었던 그날, 3·15 의거
자유당에 의하여 치뤄진 대대적인 선거부정행위, 3.15부정선거
[객원 에디터 3기/ 김민채 기자] 대한민국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4·19혁명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1960년 3·15의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50년대 말은 이승만 정부의 미국의 경제 원조 감축에 따른 경제 침체 등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더군다나 이승만은 종신 대통령의 길을 위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56년에 3선에 성공했고, 국민의 비판을 막기 위한 국가보안법까지 통과시키며 강압 정치와 집권 연장을 구체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의 신병이 악화하여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면서 조기 선거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으나, 정부는 농촌에서 농사철로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를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3월 15일로 강행했다. 이승만은 단독 후보로서 당선이 확실시됐다. 당시 상황으로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했기 때문에 자유당과 이승만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부정선거계획으로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 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부정 개표 등이 실행됐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 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했다.
국민은 선거 이전부터 자유당의 노골적 선거 개입에 항의하였고, 선거 당일 투표와 개표 상의 공공연한 부정행위에 대한 전 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의 부정선거규탄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광주 ,서울 등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이어졌다. 대규모의 평화 시위였지만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은 최루탄과 총기를 사용했고,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쳐 국회에서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3.15 부정 선거에 대한 마산 시위 과정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4월 11일, 눈 부위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 부두에서 시체로 발견되자 마산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였고 발판이되어 4·19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항거한 3ㆍ15의거의 역사적 의미와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2010년 3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3ㆍ15의거 기념일’ 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