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객원 에디터 9기 / 정동현 기자] 시험관 아기(IVF)는 과학 발전과 함께 불임 치료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생성된 다수의 배아는 선택적으로 자궁에 이식되고, 나머지는 액체질소 속 -196°C 환경에서 냉동 보관된다.
2002년 Machtinger 등 의 연구는 2~9년간 냉동 보관된 배아와 6개월 이하 보관군 간의 착상률(4.5% vs 5.5%)에 의미 있는 차이가 없었다고 보고했다. 11,768개의 배아를 분석한 대규모의 연구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냉동 배아를 몇 년 동안 −196°C의 매우 낮은 온도에서 보관한 뒤 다시 해동했을 때,
배아가 살아남는 비율(생존율)이 약 86~88%였고, 착상(자궁에 자리 잡는 것), 임신 성공률, 출산까지 이뤄지는 비율도 보관 기간이 짧은 경우(예: 수개월)와 긴 경우(예: 5년 이상)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뿐만 아니라 냉동 배아의 장기 보관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4년 《American Journal of Obstetrics and Gynecology》에 실린 Ana Cobo 등의 대규모 연구(배아 58,001개 분석)에서도 최대 34.8개월 이상 장기 보관된 배아의 생존율·임신율·출산율이 단기 보관군과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20년 이상에 걸친 두 연구는 공통적으로, 배아의 냉동 보관 기간이 성공적인 착상과 출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뒷받침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오래 냉동했다고 해서 배아의 질이 나빠지거나 임신이 잘 안 되는 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기술의 발전과 달리, 냉동된 배아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시술 성공 후 남은 배아는 향후 재임신을 위해 보관되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시간이 흐르며 폐기되거나 ‘유보’ 상태로 남는다. 이처럼 주인을 잃고 수년간 방치되는 배아는 의료기관의 관리 부담을 가중시키고, 배아의 법적·윤리적 지위에 대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한다.
국제 생식의학 저널(Fertility and Sterility, 2020)에 따르면, 미국 내 보관 배아의 60% 이상이 장기 미사용 상태에 놓여 있으며, 폐기 절차나 보호 기준은 병원마다 상이하다고 밝혔다. 냉동 배아의 대량 폐기 현실은 생명권 논의로 이어진다. 일부 국가는 배아를 세포 집합체로 보지만, 종교적·문화적 배경에 따라 생명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강하다. 특히 보수적인 남부 지역에서는 배아를 ‘생명’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해, 해당 판결의 배경이 된 것으로 풀이된다.
해외에서도 이 같은 논쟁은 실제 법적 판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2024년 2월,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Wrongful Death of a Minor Act(1872년 제정)가 냉동 배아에도 적용된다고 판결하며, 이를 ‘자궁 외(extrauterine) 아동’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최소 3개 이상 IVF 시술 병원들이 “냉동 배아는 생명”이라는 법적 해석으로 인해 시술을 일시 중단했다. 이 판결은 배아를 단순 자산이 아닌 *‘생명체’*로 본 최초의 주요 판례로, IVF 기술 전반에 걸쳐 법·윤리적 논쟁을 촉발했다.
판결문은 “냉동 배아는 14일 기준을 넘어선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자녀(unborn child)’이며, 법률상 보호 대상”이라고 명시하면서 기존의 “person 또는 child가 아니다”는 결론을 뒤집었다. 이는 미국 내에서도 배아를 재산(property)이 아닌 생명(life)으로 보는 첫 유의미한 판결로, 향후 국제적 법적 기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평가다.
법적 공백과 윤리 기준 부재
현재 한국의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배아는 ‘수정 후 14일 이내의 인간배아’로 정의되지만, 법적 권리는 부여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보관 및 폐기 여부는 의료기관과 보호자의 동의만으로 결정되며, 사회적·윤리적 기준은 사실상 공백 상태에 놓여 있다.
보건의료계와 생명윤리학계는 이러한 현실을 두고 “더는 행정 편의에 따라 생명의 운명이 결정되어선 안 된다”라고 지적한다. 특히, 배아가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만큼, 공적 윤리 기준과 법적 가이드라인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법제화와 사회적 합의, 이제는 ‘결정’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컨대 유럽 일부 국가처럼 배아 보관기간에 대한 법적 상한선 도입, 공공 배아은행 설립, 유산배아에 대한 윤리심의 기구 마련 등이 논의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배아의 법적 지위, 보관 기간, 폐기 절차 등을 명확히 규정한 별도의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단순히 의료 시스템 내 행정절차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생명과 윤리에 대한 사회적 판단을 제도 안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아를 둘러싼 생명권 논쟁은 결국, 우리가 생명을 어디에서부터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과학의 눈과 사회의 윤리, 그리고 법의 역할이 함께 모색되어야 할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