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llustration by Yujin Jeon 2007(전유진) >
[위즈덤 아고라 / 신승우 기자] 2021년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는 1991년 소말리아 내전 속에서 남북한 외교관들이 함께 탈출하는 극적인 사건을 그린 영화다. 영화 속 남북한 대사들은 유엔 가입을 위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표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아시아 동쪽 끝에 있는 남북한은 왜 중요해 보이지 않던 아프리카, 그것도 소말리아에 남북한 대사관이 동시에 존재했을까? 이 영화가 다룬 1990년대는 사실 30여 년에 걸친 치열한 외교전이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1991년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고,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경쟁도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 30년간 아프리카 대륙은 남북한에 있어 단순한 외교 무대가 아닌 체제 생존을 건 전쟁터였다.
극적인 대비가 이를 보여준다. 2024년 서울에서는 48개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이 모여 한-아프리카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불과 50여 년 전인 1970년대 한국의 아프리카 내 입지는 매우 좁았다. 당시 가봉이 한국의 가장 강력한 우방국으로서 사실상 유일하게 한국과 긴밀히 교류하던 국가였다. 반면 같은 시기 북한은 40여 개국과 교류했고, 모잠비크의 수도에는 ‘김일성 거리’가 존재했다. 이 극적인 역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남북한의 아프리카 외교전은 완벽한 3막 드라마다. 1막은 1960~70년대 반제국주의를 내세워 아프리카 외교에서 우위를 점한 북한, 2막은 1980년대 서울 올림픽과 테러로 인한 남한의 극적인 역전, 3막은 냉전 이후 이념에서 실리로 전환된 새로운 경쟁이다. 막마다 주인공이 바뀌고 규칙이 바뀌며 결말 또한 달라진다.
제1막: 반제국주의로 아프리카를 장악한 북한 (1960 – 70년대)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로 불린다. 이 해에만 아프리카 17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 대표적으로 세네갈, 말리,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케냐, 콩고 등이 있다. 1960년대 내내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독립의 물결이 이어졌고, 이들은 연이어 유엔에 가입하며 국제 무대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했다. 한반도 문제가 유엔에서 표결될 때마다 이들의 한 표 한 표는 결정적이었기에 남북한 모두에게 아프리카는 외교적 생존을 좌우하는 무대가 되었다.
북한이 1960년대 아프리카 외교에서 우위를 점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영국과 벨기에 등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며 서방 세계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다수의 신생 독립국이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이 집권했고, 에티오피아는 1975년 군부 쿠데타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독립한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자연스러운 대안으로 인식됐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이들을 직접 수탈한 전력이 없었고 독립을 지지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비동맹운동이 확산되자 북한은 “우리도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었다”며 반제국주의를 공감대로 삼아 관계를 넓혔다. 북한은 실질적 지원도 병행했다. 1970년대 앙골라 내전에는 군인과 군사 고문관을 파견했고, 1973년 욤키푸르 전쟁에서는 조종사를 이집트에 파견했다. 나미비아 독립운동 조직 SWAPO에도 군사 훈련과 무기를 지원했다.
같은 시기 한국은 고립돼 있었다. 1970년대 한국의 아프리카 우방국은 사실상 가봉이 유일했다. 한국전쟁에 파병했던 에티오피아마저 1975년 사회주의화되며 관계가 단절됐다. 한국은 비동맹운동 가입을 시도했지만 북한의 견제로 실패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시 아파르헤이트 정책으로 접근이 어려웠다. 1960~70년대 아프리카는 한국에 닫힌 대륙이었다. 제1막이 막을 내릴 무렵, 수교국 기준으로 북한 약 40개국, 한국 1개국이라는 명확한 격차가 존재했다.
제2막: 올림픽과 테러가 바꾼 판도 (1980년대)
제2막은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막을 올렸다. IOC 총회에서 서울이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것이다. 서울 올림픽에 공산권 국가가 참여할지가 굉장히 민감한 이슈였다. 직전 3개의 올림픽 모두 보이콧으로 얼룩졌기 때문이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은 남아공의 흑인 인종차별 문제로 아프리카 26개국이 거부했고,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은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서방 국가들이 대거 불참했으며,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불참했다. 서울 올림픽을 성공시키려면 동서 진영 모두의 참가가 필수였고, 이를 위해서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지가 절실했기에 한국은 외교에 전력을 쏟기 시작했다.
1980년대 한국에는 새로운 무기가 있었다. 197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력은 북한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1인당 GDP는 1970년대 중반 역전되었고, 격차는 급격하게 벌어지면서 1980년 기준 한국은 1,686달러, 북한은 600~800달러대였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대규모 투자를 가능하게 했다. 1982년 한국 대통령 최초로 아프리카 4개국을 순방하며 경제 개발 경험을 전수하고 인적 교류를 강화했다. 이념이 아닌 실리로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제2막의 전환점은 비극에서 왔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겨냥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한국 고위 인사 17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북한의 국제적 평판을 단숨에 급락시켰다. 여러 아프리카 국가가 즉각 북한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고 한국과 외교·경제 협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반제국주의 연대를 외쳐도, 테러국과의 관계는 국제 정세상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제적 협력을 강화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대성공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보이콧 사태와 달리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까지 참가했다. 이는 한국의 외교력을 전 세계에 증명하는 무대였다. 올림픽 이후 노태우 정부의 공산권에 대한 외교 전략인 ‘북방정책’의 결과로 한국은 탄자니아, 잠비아, 짐바브웨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수교할 수 있었다. 한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제2막이 막을 내릴 때, 판도는 완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한국의 급성장과 북한의 아웅산 묘소 테러라는 자충수가 만든 역전이었다.
제3막: 냉전 이후 새로운 경쟁 (1990년대 – 현재)
제3막은 1991년 8월 17일, 남북한이 UN에 동시에 가입하면서 시작된다. 체제 경쟁은 사실상 종료되었고, 문제는 누가 아프리카에 실질적인 이익을 제공하느냐였다. 이념의 시대는 끝났고, 실리의 시대가 시작됐다. 한국의 전략은 명확했다. 한국은 과거 경제 발전 경험을 아프리카에 전수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2003년부터 새마을 운동을 필리핀, 미얀마, 콩고, 우간다 등 개발도상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은 지도자 양성과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중시하는 점에서 전통 개발 모델과 차별화되었다. 콩고에서는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양옥집을 짓는 사업이 성공을 거뒀으며, 르완다의 폴 카가메 대통령은 “르완다의 고도성장은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받아들인 덕분입니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에 북한은 실질적인 원조보다는 과거의 이념을 강조하는 데에 집중했다. 나미비아를 통해 알아보자. 1990년 나미비아가 마침내 독립했다. 흥미롭게도 같은 날 남북한 모두 나미비아와 수교했다. 북한은 김일성 시절부터 나미비아의 독립을 지원했기에 나미비아의 구 독립운동 정당 SWAPO와의 유대를 강조했다. SWAPO의 지도자 샘 누조마는 1980년대 평양을 세 차례 방문하기도 했으며, 1989년 김일성으로부터 자유독립훈장을 받기도 했다. 북한은 나미비아와의 오래된 유대를 강조하기 위해 나미비아에 다수의 기념비를 세웠다. 2002년 북한의 만수대 해외 개발 회사는 나미비아 수도 빈트후크 외곽에 영웅릉(Hero’s Acre)을 건설했고, 2014년에는 독립 기념박물관을 완공했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북한과 나미비아의 독립 이전 인연을 각인시키는 도구였다. 북한의 지원은 상징적인 측면이 강했다.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거의 없다. 반면에 한국은 실용적이고 나미비아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접근을 했다. 양국의 교류는 2000년대에 들어 늘어났다. 2007년 한국전력은 나미비아에서 우라늄 개발을 추진했다. 상주 공관은 없지만 협력은 계속되었다. 2023년에는 양국이 에너지 자원 부문 장기 파트너십을 구축해 나미비아의 천연자원 개발에 한국의 기술과 자본을 유치하는 틀을 만들었다. 남북한의 아프리카 외교는 2017년 UN 대북 제재로 인해 전환점이 왔다. 이에 따라 나미비아는 북한과의 군사 협력 중단을 발표했다.
제3막이 막을 내릴 때, 스코어는 다시 한번 역전되었다. 현재 한국은 48개 아프리카 국가와 수교한 반면, 북한은 46개국과 수교했다. 숫자의 차이는 단 2개국이지만, 실질적 영향력의 차이는 압도적이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는 거듭된 핵 개발로 국제적 고립이 심화된 북한보다는 경제 협력이 가능한 한국과의 교류를 선택했다. 완벽한 3막 드라마는 한국의 외교적 우위로 막을 내렸다.
드라마가 남긴 과제
30여 년에 걸친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은 완벽한 3막의 드라마였다. 제1막에서 북한은 초기에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연대를 내세우며 아프리카를 장악했다. 제2막에서 한국은 경제력이라는 새로운 무기와 북한의 테러로 극적인 역전을 이루었다. 올림픽은 그 성장을 증명하는 계기였다. 제3막에서 냉전이 끝나게 되면서 이념의 시대는 저물었고, 실리의 시대가 왔다. 한국은 실질적인 경제 협력으로 최종 우위를 확보했다.
우리는 이번 칼럼에서 외교력은 결국 경제력과 신뢰가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념과 연대는 강력하긴 하나 지속 가능한 관계는 상호 간의 실질적인 이익에서 나온다. 또한 단 한 번의 실수는 수십 년의 노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웅산 묘소 테러는 북한에게 ‘테러 국가’라는 낙인을 찍었고, 이는 외교까지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세대가 바뀌게 되면서 외교의 추구점이 바뀌었다. 반제국주의를 외치던 세대가 물러가고, 이익을 추구하는 세대가 등장하면서 한국의 경제 협력 모델이 빛을 발했다.
[위즈덤 글로벌] 국제 사회에서의 권력은 역변하는 정치, 경제, 외교적 요소로 인해 형성됩니다. 본 칼럼 시리즈는 글로벌 권력 구도부터 자원 외교, 금융 관계, 안보 이슈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국제 정세를 조명합니다. 시대별 주요 사건과 현상들을 분석하며 독자들에게 복잡한 경제, 정치외교적 현상을 쉽게 전달하고,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위즈덤아고라 신승우 기자의 ‘위즈덤 글로벌’ 칼럼을 통해 정치, 경제, 외교의 연관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