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즈덤 네이처]기억은 법정에서 증거가 될 수 있을까?

<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위즈덤 아고라 / 김채희 기자] 

“제가 그날 봤습니다.” 법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한 마디는, 때때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증인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배심원들의 판단을 이끌고, 판사의 결정을 좌지우지하며, 때로는 유죄와 무죄의 경계를 가른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과연 그 기억은 사실일까? 그리고,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법정에서 증거로 쓰일 만큼 신뢰할 수 있을까?

최근 수십 년간의 심리학 연구는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시 했던 기억의 절대성을 흔들어 놓는다. ‘기억은 있는 그대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재생될 때마다 재구성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이 분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는 수많은 실험을 통해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거짓된 기억이라는 개념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로프터스의 대표적인 실험은 간단했다. 참가자들에게 교통사고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여준 뒤,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차가 멈췄을 때 부딪혔나요?” 혹은 “차가 박살 났을 때 충돌했나요?” 영상은 동일했지만 질문에 사용된 단어 하나가 사람들의 기억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박살 났다’는 식의 강한 표현을 들은 참가자들은 사고를 훨씬 심각하게 떠올렸고, 실제로는 없었던 유리 파편까지 기억해 냈다. 이는 기억이 얼마나 쉽게 외부 정보에 의해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예시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은 실제 재판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된다. 2021년, 기슬레인 맥스웰(Ghislaine Maxwell)은 미성년자 성범죄와 관련된 혐의로 재판에 섰다. 맥스웰의 변호인단은 피해자들의 증언이 수십 년 전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기억은 치료과정, 미디어, 또는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를 증인으로 내세우며, 피해자의 기억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기억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는 특히 아동의 진술과 관련하여 더욱 심각해진다. 연구에 따르면 아동은 성인보다 훨씬 외부 암시에 민감하며, 반복적인 질문이나 권위 있는 어른의 압박에 의해 자신의 기억을 왜곡시키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았던 경험을 상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아저씨가 너를 만졌니?”라는 질문이 여러 번 반복되면, 실제로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아이는 그것을 기억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만 3세에서 7세 사이의 어린이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과거에는 이러한 아동의 증언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우리는 기억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기억이 쉽게 왜곡되는 데는 분명한 과학적 이유가 있다. 기억은 단일한 데이터 조각이 아니라, 다양한 감각 정보와 해석, 감정이 조합된 아주 복잡한 것이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기존의 기억과 섞여 새로운 기억이 생성되기도 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합성 기억’이라 부른다. 질문의 문장 구성, 주변 사람들의 말, 뉴스나 영화 같은 외부 자극은 이 합성 과정을 자극하고, 때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을 만들어낸다. PTSD 환자처럼 강한 충격을 경험한 경우에는 아예 기억 자체가 차단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남는 경우도 많다. 사건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고통스러운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일도 있다.

성범죄나 강도처럼 목격자의 진술에 크게 의존하는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기억이 사실상 유일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CBS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60 Minutes가 다룬 “Eyewitness: How accurate is visual memory?”는 기억은 얼마나 믿음직한가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 프로그램은 로널드 코튼(Ronald Cotton)이라는 남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억의 취약성과 그로 인한 법적 오류를 조명한다. 1984년, 한 여성이 강간 피해를 당한 후 병원에서 경찰 수사관의 도움을 받아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었고, 이어 사진 줄 세우기(photo lineup)를 통해 로널드 코튼을 가해자로 지목했다. 그녀는 그 얼굴을 “절대 잊을 수 없다”라고 확신했지만, 그 확신은 잘못된 것이었다. 

코튼은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강간범으로 몰려 11년 동안 억울하게 복역했다. 그의 삶을 망가트린 이 기억은 법정에서도 피해자의 강한 확신으로 뒷받침되었고, 배심원과 판사 모두 그 진술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년 뒤 DNA 증거가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밝혀냈고, 그제야 코튼은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 사건은 단순히 ‘기억이 틀릴 수 있다’는 문제를 넘어, 기억이 법정에서 얼마나 위험한 증거가 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피해자의 확신, 수사관의 유도적 질문, 그리고 당시 과학기술의 한계가 겹치면, 무고한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오류가 기억의 본질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기억은 감정, 주변 환경, 반복된 질문 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60 Minutes는 보도를 통해 몇 가지 제도적 개혁을 제안했다. 피해자 진술을 수사 초기부터 신중히 다루고, 확신 유도 질문을 피하며, 가능한 한 과학적 증거(DNA, CCTV 등)에 기반한 수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로널드 코튼의 사례는 기억은 곧 진실이라는 사회적 신념에 균열을 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격자의 증언을 전적으로 배제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기억은 사건을 단순히 복사해 두는 기능을 넘어, 그것을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기억은 때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절대적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다. 기억의 취약성과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다른 증거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해석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누군가 “나는 봤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본 것은 정말로 있었던 일인가? 아니면, 당신의 감정과 환경,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낸 이야기인가? 법이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은 그 진실을 더 명확히 들여다보게 해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위즈덤 네이처] 뇌는 우리의 사고, 감정, 기억을 조율하는 아주 복잡한 기관입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학습하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형성하는 뇌를 이해하기 위해, 신경과학은 오랜 세월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질문이 남아 있으며, 과학자들은 오늘도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뇌과학이 던지는 흥미로운 질문들을 탐구하며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깊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신경과학이 밝혀낸 놀라운 발견과 아직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통해, 뇌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함께 고민해 보는 칼럼을 연재하고 싶습니다. 위즈덤 아고라 김채희 기자의 ‘위즈덤 네이처’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우리의 뇌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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