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OpenAI의 DALL·E 제공 >
[객원 에디터 9기 / 윤채원 기자] 좋은 의료 시스템이란 보통 인구의 필요와 기대에 균형 있게 대응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체계를 말한다. 그러나 복지와 경제 성장은 본질적으로 상충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시스템 내에서 의료 접근성과 산업 발전을 동시에 이루는 것은 어려운 과제이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과 미국의 의료 시스템 차이이다. 어떤 과정에서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고, 어떻게 하면 그 격차를 감소할 수 있을지 알아보자.
2021년 기준, 한국은 연평균 15.7회 병원을 방문하여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한국은 1960년대 급속한 산업화의 가속을 경험하며 노동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지속적인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했고, 이에 따라 근로자들의 건강과 사회적 불안을 책임질 방안이 필요했다. 국가 차원에서의 보건 정책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77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이 처음 도입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국민의 사회복지 요구가 높아졌고, 이로 인해 1988년 복지 정책이 확대되어 전 국민 건강보험이 추진되었다. 정리하자면, 한국은 의료 서비스의 확대가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해 경제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료 접근성이 높아진 반면 민간 의료 산업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병원과 제약업계의 자유 시장 경쟁이 제한되었고, 투자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았다.
반면, 2019년 미국인은 100명당 320.7회의 외래 진료를 받았으며, 이는 1인당 평균 3.2회에 해당한다. 건국 초기부터 작은 정부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상에 기초한 미국은 당시 유럽과 달리 중앙정부의 권력이 강하지 않았고 각 주들이 독립적인 정책을 운영하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국민의 삶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사례이다. 더욱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대표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국가 주도의 의료 시스템은 공산주의 체제의 국가들의 채택한 정책이므로, 미국 보수 정당은 정부가 의료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 미국을 공산주의화하는데 일환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의료 서비스 역시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민간 보험 중심의 의료 시스템을 유지하게 되었고, 따라서 의료 비용이 증가하고 의료 접근성은 낮아졌다. 그래서 14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통해 의료 산업을 육성하였으나, 이는 주로 제약 및 바이오테크 산업의 혁신을 지원하는 데 집중되었고, 아직까지 일반 서민들의 의료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의료 접근성과 산업 발전의 균형은 단순한 정책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각국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구조 변화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의료 접근성과 산업 발전이 균형 있게 발전한 국가는 어디일까?
독일은 사회보험과 민간보험이 공존하는 의료 시스템을 운영하여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면서, 민간 의료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한국보다 R&D 투자액이 3배 이상 많으며, 제약산업의 규모는 2~3배 이상 크다. 독일의 사회보험 제도는 1883년 비스마르크 총리가 도입한 사회보험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은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며 노동자들의 건강 및 복지 문제가 사회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사회적 불안 해소와 노동 생산성 유지를 위해 최초의 사회보험 제도를 도입하였다. 한편, 독일은 19세기 후반부터 유럽 내에서 이미 강력한 제조업 국가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대표적인 글로벌 제약사(바이엘, 머크 등)와 의료기기 기업(지멘스, 헬시니어스 등)이 이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의료 접근성과 헬스케어 산업의 발전을 동시에 이루는 것은 어려운 과제이다. 두 가지를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가장 이상적이며, 여러 나라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항상 균형추를 조절하며 격차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기반이 탄탄해야 한다. 과학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이다. 과학에 관심이 있다면, 수많은 이론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과학이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