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Gemini 제공 >
뇌 재고착 방해와 IPMK 조절로 트라우마 기억 선택적 약화 연구
[위즈덤 아고라 / 임지나 기자]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주인공 조엘이 이별한 연인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기억을 제거하기 위해 특정 기억을 선택적으로 삭제하는 시술을 받는 과정을 다룬다. 영화 속 기술은 기억을 컴퓨터 파일처럼 골라 지우는 방식으로 묘사되며,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기억마저 순차적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설정은 현재까지는 공상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만, 실제로 기억을 조절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신경과학적 연구는 빠르게 진전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기억 조작 기술이 허구에 불과했으나, 최근에는 신경과학과 분자생물학, 약리학이 결합하면서 특정 기억을 선택적으로 약화시키거나 감정 반응을 조절하는 기술이 동물 모델에서 점진적으로 검증되고 있다. 아직까지 인간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다양한 실험 결과들은 기억 조절 기술의 임상적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기억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뇌에 ‘정적인 이미지’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신경세포 간의 복잡한 연결망인 시냅스(synapse)에서 신경전달물질이 작용하며 생성되는 가소적(plastic)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탐산은 NMDA 수용체에 결합하여 세포 내로 칼슘 이온을 유입시키고, 이는 단백질 합성을 유도하여 시냅스 강화(LTP)를 야기한다. 이렇게 강화된 시냅스는 해당 기억을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는 기반이 된다.
주목할 점은, 한 번 형성된 기억도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과정에서 해당 기억은 일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로 돌아가며, 이를 ‘재고착(reconsolidation)’이라 부른다. 이 시점에서 단백질 합성이 방해될 경우, 해당 기억은 이전보다 약화된 형태로 다시 저장되거나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실제로 동물 실험에서 단백질 합성 억제제인 아니소마이신을 재고착 시점에 투여했을 때, 특정 공포 기억이 선택적으로 소멸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에 적용 가능성이 높다. PTSD 환자는 특정 자극에 반복적으로 과도한 감정 반응을 보이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다. 현재까지 연구된 방법 중 하나는 ‘감정의 분리’이다. 이는 기억 자체를 제거하기보다는, 그 기억이 환기시키는 부정적인 감정을 약화시키는 접근이다. 예컨대, 베타 차단제 계열의 약물인 프로프라놀롤은 교감신경계를 차단하여 기억 재활성화 직후에 감정 반응을 둔화시킨다. 결과적으로 PTSD 환자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더라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심리적 불안을 경험하지 않게 된다.
현재까지 연구된 기억 조절 전략은 세 가지 주요 범주로 나뉜다. 첫째, 재고착 과정을 방해하여 기억 자체를 약화시키는 방법. 둘째, 기억은 그대로 두되 감정 반응을 조절하여 고통을 감소시키는 방식. 셋째,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와 같은 뇌의 내재적 회로 재조정 메커니즘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특정 기억을 보다 빠르게 약화시키는 전략이다. 세 번째 방법은 아직 기초 연구 단계에 있지만, 뇌의 불필요한 연결을 능동적으로 제거하는 과정을 제어함으로써 치료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 KAIST 생명과학과 김세윤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해당 연구는 ‘이노시톨 폴리인산 대사효소(IPMK)’라는 효소의 조절을 통해 공포 기억을 선택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음을 동물 실험을 통해 입증하였다. 이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PNAS)에 게재되었으며, 국내에서는 한국연구재단과 KAIST가 공동 발표하였다.
연구의 출발점은 “공포는 현대인의 정신 건강에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문제의식이다. 특히 PTSD와 같은 질환의 근본적 치료를 위해서는 공포 기억의 생물학적 기반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연구팀은 신경세포 내 다양한 신호 전달 경로를 조절하는 IPMK 효소가 공포 기억의 소거 과정에 관여할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연구는 고전적 조건화(paradigmatic conditioning)를 이용한 쥐 실험으로 구성되었다. 쥐에게 특정 소리 자극과 함께 경미한 전기 자극을 병행하여 공포 반응을 학습시키고, 이후 전기 자극 없이 소리만을 반복적으로 노출하는 소거(extinction) 과정을 통해 공포 반응의 변화 양상을 관찰하였다. 실험 결과, IPMK가 제거된 실험군에서는 공포 반응의 감소 속도가 대조군보다 유의미하게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공포 기억의 약화가 공간 기억이나 일반적 학습 능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IPMK가 공포 관련 정서 기억에 특이적으로 관여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연구팀은 추가 분석을 통해 IPMK 제거가 편도체(amygdala)에서 p85 S6 K1 단백질의 증가를 유도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해당 단백질은 시냅스 가소성과 관련된 신호전달 경로에서 핵심 역할을 하며, 기억 회로의 약화 또는 강화에 직결되는 요소다.
또한 해마(hippocampus)에서 측정한 시냅스 반응성에서도 IPMK 제거 쥐는 시냅스 강화 후 소거(LTD)가 보다 쉽게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공포 기억이 상대적으로 덜 지속되는 이유에 대한 생리학적 근거를 제공하며, 특정 회로가 공포 자극에 대해 과도하게 고착되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해당 연구는 이전의 비표적 약물들이 광범위한 기억 체계에 영향을 미친 반면, 특정 효소의 억제를 통해 공포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비록 현재는 유전자 조작 모델을 이용한 전 임상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만, 향후 IPMK를 표적으로 하는 선택적 억제 약물이 개발된다면 PTSD 및 특정 불안 장애 치료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인간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대표적으로는 약물이 혈액-뇌 장벽(Blood-Brain Barrier, BBB)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전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분자 설계가 필요하다. BBB는 외부 물질로부터 뇌를 보호하는 생체 방어체계이지만, 동시에 약물 전달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약물이 지용성(lipophilic) 성질을 갖추거나 특정 수송체를 활용하는 방식이 연구되고 있으나, 전신 독성의 위험도 동반된다.
또한 현재 IPMK 기능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유전자 조작이기 때문에, 인간 대상 치료를 위해서는 해당 효소의 활성을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저분자 화합물의 개발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IPMK의 3차 구조를 고해상도로 규명하고, 결합부위에 작용할 수 있는 약물 후보를 선별하는 구조 기반 약물 설계(structure-based drug design)가 필요하다. 이 과정은 일반적으로 수년에서 10년 이상의 개발 주기가 소요되며, 독성 시험 및 임상단계까지 통과해야 실제 치료제로서 활용이 가능하다.
앞으로 기억 조절 기술의 발전은 단순한 뇌 과학을 넘어 분자생물학, 약리학, 나아가 윤리학적 검토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특정 감정이나 기억을 표적화 할 수 있는 약물이 개발된다면, 맞춤형 정신의학의 실현은 물론 개인의 삶의 질 개선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의 정체성과 경험을 구성하는 기억을 임의로 조작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지에 대한 철학적·윤리적 논의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 미래에 원치 않는 기억을 안전하게 조절할 수 있는 날이 오더라도, 그 기술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과학자, 의료인, 법률가, 사회가 공동으로 기준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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